본문 바로가기

트래블로그/테마 트래블로그

언니는 중국의 국모, 동생은 대만의 국모


중국 근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송씨 자매

 

청나라 봉건 왕조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던 20세기 초, 중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중국의 민족지도자 손문孫文의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혁명정부는 각지에서 난립하는 군벌 세력들로 인해 힘을 결집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런 시기를 틈타 서구열강과 일본이 중국영토를 좀먹고 있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여걸들이 있었으니, 송애령,송경령, 송미령 송씨 세자매였다.



▶유년시절의 세 자매

 

손문의 친구이자 재정적 후원자였던 송요여宋耀如는 성경과 돈을 인쇄해 부유한 사업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는 쑨원의 혁명사상을 받아들여 먼저 자기 가정의 모든 봉건주의 잔재를 없애기로 결심하고 세 딸을 청조의 봉건주의 구습에 구애받지 않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시켰다.

 

큰 딸 송애령은 13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중국 최초로 미국에서 유학한 여성이 되었다. 뒤이어 1908년에는 송경령과 송미령을 함께 미국으로 유학 보내 세 딸은 모두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게 된다. 이들은 모두 총명하고 미인이었으나 장성한 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장녀 송애령은 당시 은행 재벌이자 중국 최고의 갑부인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했고, 둘째 송경령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살이나 차이가 나는 중국의 국부 손문과, 막내 송미령은 손문의 제자이자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將介石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둘째는 중국을 사랑했고, 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는 송씨 자매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시작된다.



▶손문과 송애경




▶장개석과 송미령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경령과 송미령의 대립이다. 송경령은 손문이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여성 혁명가로 변신, 평생 중국 민중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송경령은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이 남편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 야욕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고 그와 대립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장개석과의 대립은 평생 이어졌으며, 장개석의 아내였던 동생 송미령과의 관계도 여기서 끝을 맺게 된다. 1945년 9월 항일 전쟁에 승리한 후 송경령은 모택동과 손을 잡고 송미령과 그녀의 남편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송경령은 남편 손문의 뜻을 이어받을 정부로 중국 공산당을 택한 것이다.


▶사저에서 모택동을 맞이하는 송경령



▶남편을 도와 대만의 외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송미령


그 후 송경령은 대륙의 중화인민 공화국에서, 송미령은 국민당 정부의 대만에서 각각 국모로 추앙 받게 되니, 가히 한 집의 자매가 전 중국의 국모를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자매의 활약상은 1997년 ‘송가황조<宋家皇朝>’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파란만장했던 송씨 자매의 역사는 2003년 10월 막내 송미령이 미국에서 사망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세 자매의 일대기를 다룬 '송가황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