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

대기업이 못마땅한 내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


나와 같이 사는 친구는 모 대기업을 굉장히 싫어한다. 친구의 직업은 프로그래머. 프로그램을 짜서 납품하는 일을 하다보니 기업간 갑을 관계를 누구보다 절실히 체험하고 있는 입장이다. TV를 보고 있다가 모 대기업의 뉴스가 나오면 "저런 망할 것들. 내가 치가 떨린다."라고 하며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친구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길래 대기업을 싫어하는 것일까?


이미지출처: 경향신문
1. 프로그램 소스까지 통째로 넘겨라

대기업에서는 필요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자체개발보다는 하청을 준다. 입찰경쟁을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귀찮은 주문을 해도 하청업체는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는 하청업체에 여러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그 중 프로그램을 납품 받을 때 거는 첫 번째 조건은 '소스를 모두 건네줄 것'이다. 수십 일 야근하며 창조해낸 프로그램 소스를 건넨다는 것은 그 회사의 머리를 송두리째 빼주는 것과 같다. 이런 점을 알면서도 소스까지 통째로 납품하는 것은 대기업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 대기업에서 발주하는
   이미지출처-경향신문                                   프로젝트는 대규모인 경우가 많고 작은 납품처 여러군데에 납품하는 것보다 이윤이 크기 때문이다. 당장 몸이 달아 소스까지 건네주고 나면 나중에 또 이런 조건을 건단다.


2. 납품단가를 낮춰라

경제위기다 불황이다 이래저래 안 좋은 시기다. 당연히 기업들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제품 단가를 낮추려고 노력하고 또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대기업의 경우, 그 부담을 고스란히 하청업체에 떠넘긴다는 것. 하청업체로서는 억울하지만 또 낮춰줄 수 밖에 없다. 만약 못 하겠다고 잡아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단다. "너희말고도 업체는 많다." 게다가 소스까지 넘겼기 때문에 대기업으로서는 다른 업체에 소스를 건네주고 고대로 만들어달라고만 하면 되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실제로 대기업에 납품하려는 업체는 줄을 서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하청업체는 울며 겨자먹기로 단가도 낮추게 된다.


3. 말로만 고통분담

비단 프로그램 하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 대기업이 운영하는 마트의 경우, 세일이나 1+1 상품을 기획할 때, 줄어든 수익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입점업체가 부담해야 한다. 이게 싫다면? 그럼 그 업체 철수시켜 버린다. 결국은 자기는 한 푼도 손해보지 않고 고스란히 피해를 공급업자에게 전가하는 셈이다. 고통분담, 고통분담하면서 자기 손에 피 한방울 안 묻히는 게 무슨 고통분담이란 말인가? 대기업 사원의 고액연봉은 곧 공급업체의 피땀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4. 아니꼬우면 대기업 들어가라?

결국 결론은 하나다. 아니꼬우면 대기업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처럼 대기업 들어가서 착취당하는 '을'이 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신입사원 초봉이 3,000만원 넘는 대기업이 우리나라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아마 5%도 안될 것이다. 그럼 나머지 95%는 고스란히 당하고 살란 말인가. 나는 왜 '아니꼬우면 대기업 들어가라'는 말이 '등록금 비싸면 장학금 받아라'라는 말과 똑같이 들릴까... 대학에서 장학금 받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길래. 아니, 장학금 못받으면 대학생 자격도 없는 것일까?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5.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하는 이상한 논리

유럽 봉건주의 시대는 전체 인구의 3%도 안되는 영주를 위해 97%의 농노가 피땀흘려야 하는 되는 모순된 사회구조였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고 신분의 평등을 이룬지 수백년도 지났는데,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21세기에 구시대적인 봉건주의와 똑같은 사회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대기업이 먼저 금고를 열어라', '대기업이 먼저 살아야 나머지 기업을 이끌고 나간다'는 식의 논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경제에 있어 봉건주의가 펼쳐질 것 같다.


6. 우리나라에서 닌텐도 만들어? 꿈도 꾸지 마라.

예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애플이 만드는 아이팟에 절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해준 적이 있었다. 반대로 국내 MP3 업체는 메모리 품귀 현상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 대기업의 전략은 한 가지. 전세계에 자기네와 애플, 소니만 남겨두고 나머지 MP3 업체는 없애버려 세계적인 3강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코묻은 아이 사탕 뺏어먹는 어른'이 생각날까.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면 왠만하면 그냥 놔두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대기업이 안 끼어드는 사업은 과연 어떤 분야일까. 어떡하면 대기업 안들어가고도 세계에서 1등하는 제품 만들어낼 수 있을까. 중소기업 들어가면 세계 1등 제품을 만든다는 꿈은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애시당초 말도 안된다. 닌텐도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아마 초창기에 부품 공급 안해주는 대기업 때문에 고사했을 것이다.

                                                         지금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이런 물건 밖에 안 나온다

어릴 적 장래희망을 적을 때 '청소부'를 적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렇게 적었으면 부모님이 혼냈을 것이다. 그렇게 꿈이 없냐고. 하지만 아무도 하기 싫어한다면, 과연 거리 청소는 누가 할 것인가? 나는 그게 참 궁금했다. (요즘은 박사학위 받은 사람까지 지원할 정도로 인기 직업이 되었지만) 결국은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에서 시작해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보상에 차별을 두는' 문제가 발전해 지금 이지경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신입사원 초봉을 깎는다고 하던데, 이건 좋다. 다만 그게 대기업에만 국한한 문제로 결론짓지 말고 우리 사회의 95%에 이르는 중소기업 처우에 대한 문제로 확대해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본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눈이 높아서? 아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보상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 똑똑한 청년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를 쓰고 시간이 들더라도 출발을 좋은 곳에서 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발 정부에서도 문제를 똑바로 인식했으면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보상의 차이와,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횡포, 그리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의 1등 주의 사고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지금 앞선 세대가 만들어 놓은 잘못된 시스템에 앳된 청년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다. 중소기업 들어가면 장가도 못갈 정도의 열악한 처우. 너무나 벌어진 대기업과의 차이. 이 간극을 좁히는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보다 좀 못하더라도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좋지 않을까. 지금의 이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