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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로그/일본 트래블로그

도자기의 신 이삼평이 일본에 남은 이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많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조총 같은 무기의 발전은 빨랐지만 문화적인 발전은 더딘 편이었다. 조선에서 납치한 수많은 기술자 중에 특히 환영받는 계층이 있었으니, 바로 그릇이나 항아리를 만드는 도자기 기술자들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나무로 만든 밥그릇을 썼다고 한다. 도자기로 만든 밥그릇은 부유층이나 귀족들만이 점유하는 사치품이었고, 일반인이 도기그릇을 가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현재 빼어난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일본 아리타야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손들이 만든 것이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들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도자기 기술 유출을 막으려는 영주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조선인들끼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이 중에는 이삼평이라는 걸출한 인물도 있었다. 속설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던 이삼평이 전란 후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워 자의로 일본군을 따라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빼어난 도공이었다는 기록만은 차이가 없다.

규슈로 끌려와 처음 도자기를 굽던 이삼평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일본에는 한국의 고령토처럼 질 좋은 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 만든 도자기는 대부분 쉽게 부서졌고,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질 좋은 흙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규슈 전역을 돌며 도자기 만들기에 적합한 흙을 찾아나선다.



                   이삼평이 발견했다던 이즈미야마 광산. 이곳에서 질 좋은 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삼평은 드디어 고령토에 버금가는 질 좋은 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곳이 현재의 아리타(有田) 부근에 있는 이즈미야마 광산이었다. 이삼평은 그 곳에 정착해 평생동안 도자기 굽는 일에 매진하게 되고, 이삼평의 자손들도 대를 이루어 아리타에 살며 도자기 굽는 기술을 계승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일본의 도조(陶祖)로서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과 신사가 세워져 있다.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 도자기의 신을 모신 신사답게 도리이도 나무가 아닌 자기로 만들어졌다.

 

예전에 일본을 방문한 영국 수상에게 일본의 도자기를 선물하는 모습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계승할 사람을 찾지 못해 대가 끊길 지경에 처해있는데, 우리나라 도공의 후손이 만든 일본의 도자기는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명품으로 선정되고 있으니 참 기분이 묘했다. 규슈 사가현은 이마리와 가라츠, 아리타 등 일본 제일의 도자기 산지가 모여있는 곳이다. 사가현은 규슈 7개현 중에서 외국인의 눈길을 끌만한 화려한 관광자원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대 문화를 알 수 있는 역사유물이 많이 흩어져 있다


             아리타와 함께 도자기의 명산지라 불리는 이마리. 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공방이 늘어서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삼평은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본에 남았다고 한다. 사농공상의 계급에 따라 기술자가 천대받는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에 남는 것이 더 대우가 나았기 때문이다. 대대로 기술자를 천대하는 우리나라의 풍조가 오늘날 도자기 선진국 자리를 일본에 넘겨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