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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우리말에 있는 70%의 한자단어는 모두 일본말이다?


한때 ‘한글 전용론’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한자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이 크고, 또한 한자 단어가 70%가 넘는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우선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어 공부하기 쉽도록 한자를 배운다는 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한자를 공부한다? 한자는 분명 중국에서 건너온 단어인데 왜 우리말을 알기 위해 한자를 배워야 할까요? 사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답니다. 또 다른 한자문화권인 일본식민지배 때문이지요.

우리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식 한자 단어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조선과 같이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인해 최초로 미국과 수교한 이후, 유럽 열강과도 차례차례 수교하게 되었지요. 몇 번의 해외시찰단을 보내고 일본이 얻은 결론은 이대로 가면 일본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하게 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입니다. 천황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껍데기부터 속까지 바꾸는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일본은 불과 40년도 안되어 유럽 강대국을 따라잡게 되었답니다.


     <서구 문물을 보고 온 미국 시찰단의 모습. 이 중 1만엔권의 모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있습니다.>

단기간에 선진국을 따라 잡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속된 말로 ‘베끼는’ 것이었습니다. 즉, 군대는 독일에서, 산업은 미국에서, 농업은 프랑스에서… 라는 식으로 각 분야의 가장 잘 된 모델을 그대로 들여와 일본에 도입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전까지는 일본에 없던 것이었으니 보고 공부할 매뉴얼이라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외국 원서를 들여와 다시 일본말로 번역해서 봐야겠지요. 그래서 메이지 시대에는 번역작업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대, 다른 말로 번역의 시대


하지만 일본의 번역가들은 큰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전까지 전혀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기에 번역을 하면서 그에 맞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던 것이었지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일본의 번역가들은 한자를 조합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는데요. 의학을 예로 들면, ‘신경’ ‘연골’ '동맥’, 경제를 예로 들면 ‘산업’ ‘경영’ 문학을 예로 들면 ‘낭만’ ‘애정’ 등등의 단어가 그전까지는 일본에 없었던 메이지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단어들입니다.

특히 ‘낭만(浪漫)’ 같은 단어는 영어단어인 ‘로맨스(Romance)’를 일본어로 음차해 만든 단어인데요. 우리나라 한자 발음으로는 ‘낭만’이지만 일본식으로 읽으면 ‘로망(ロマン)’이 된답니다.



      <네덜란드 의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 수많은 의학 단어가 이 책을 번역하면서 탄생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한자단어들은 이후로 일본에서 점점 정착하게 되는데요. 이런 단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그대로 도입되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단어들은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어인 셈이지요. 우리가 일본어를 배우기 쉬운 이유 중의 하나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인데요,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한자 단어가 우리말로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일본어 원서 번역하면서 일본어 단어가 쓰여


그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런 단어들이 우리말로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일본어 원서를 우리말로 번역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림 동화’같은 어린이용 동화도 영어나 독일 원서가 아닌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들여와 우리말로 다시 번역했답니다. 그래서 ‘파랑새’에 나오는 주인공 남매 틸틸과 미틸의 이름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어 발음인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불렸던 것이지요. 중학교 시절, 무려 문교부에서 만든 교과서에도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정식 표기되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치르치르와 미치로로 읽는 사람이 많은 '파랑새' 원래는 틸틸과 미틸입니다.>

아무래도 당시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여건상 머나먼 유럽이나 미국의 원서를 들여오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대신 가까이 있는 선진국이었던 일본의 번역본을 들여왔던 것이겠지요. 즉, 우리가 읽었던 많은 외국책들은 영어-일본어-한국어로 2차 번역된 책이었던 것입니다.


마치며…


지금에 와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언어란 다수의 합의를 얻어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정착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중국이 아닌 일본의 영향 때문이라는 점은 알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안 된 말이긴 하지만 ‘우리말을 더욱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자를 배운다’가 아닌 ‘메이지 시대 만들어진 일본식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배운다’가 정확한 표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