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서양문물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본이지만, 일본 역시 서양인에게 그렇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철포, 즉 조총을 도입해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문물에 가장 트인 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에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가장 걸리는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신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라는 천주교의 교리는 일본의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었고, 자칫하면 천황제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고심 끝에 일본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교역 상대를 바꾸게 되는데, 이유는 네덜란드가 종교적인 포교를 배제하고 오로지 무역만 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신생국이었던 네덜란드는 교리에 너그러웠던 신교 프로테스탄트 국가였고, 또한 국가적으로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포교에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다.

 

당시 네덜란드의 이름은 홀랜드(holand)였고, 이것이 일본식으로 와전되어 오란다가 되고 네덜란드인을 오란다상이라고 부르게 된다. (지금도 월드컵 때 일본 중계를 보면 네덜란드를 오란다로 표기한다.) 이것은 점차 서양인을 총칭하는 말로 굳어졌고 당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에는 서양인의 거리라는 뜻의 오란다자카가 지금도 남아있다.




                   잘 정돈되어 있는 나가사키의 오란다자카. 물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천주교 신자들이 주동한 시마바라의 난 같은 민란이 일어났던 터라 일본정부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래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에 인공섬을 만들어 일본에 들어오는 네덜란드인들의 집단 거류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나가사키에 남아있는 데지마.



     당시의 데지마를 재현한 축소 모형. 보는 바와 같이 다리 하나만 연결되어 있는 고립된 섬이었다.

 

일반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데지마는 섬으로 떨어져 있었고, 육지와 연결된 문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이곳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네덜란드인의 시름을 달래줄 유녀뿐이었고, 일반인이 허락없이 데지마에 사는 네덜란드인과 교류할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데지마에 사는 네덜란드인과의 교류는 늘어났고, 이들에게서 해부학이나 외과수술 같은 서양의술이 전해져 후에 난학이라는 서양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과수술 장면을 기록한 일본화. 일본인들에게는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가사키는 근대 개국 이전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만큼 이국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우리에겐 원폭투하의 이미지가 선명한 나가사키지만 이제 그 이미지를 씻어내고 이국적인 개항장으로서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은 폐쇄된 데지마의 유일한 출입구. 아래쪽에 보이는 운하가 이곳이 과거에 섬이었음을 증명한다.




                        데지마 곳곳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마크 VOC가 새겨져 있다.




정갈하게 복원되어 있는 데지마의 건물들. 오른쪽에 보이는 초록색 난간이 있는 건물은 데지마 총독의 숙소다.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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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oyvillage.tistory.com BlogIcon 라이너스™ 2009.04.03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란다자카에 그런 의미가... 재미있네요^^
    아침부터 재미있는 포스팅 잘보고갑니다^^

  2. Favicon of http://daqcast.tistory.com BlogIcon beeniru 2009.04.08 1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BS 에서 이곳에 관한 프로그램을 몇 차례 방영했답니다. 참고 하세요.. http://www.kbs.co.kr/1tv/sisa/walkworld/vod/1393699_15192.html
    일본 개화의 창, 나가사키 데지마
    http://www.kbs.co.kr/1tv/sisa/histroytour/vod/1422816_19896.html

  3. Favicon of http://browncafe.tistory.com BlogIcon 클라리사~ 2009.04.08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여기 참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역사적 배경과 그러면서도 '섬'이라는 형태로 그 특별구역을 유지했던 일본의 방법 등이 흥미로웠고요.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 중에는 서양음식이라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음식인 경우가 많다.
돈가쓰가 대표적으로, 원래는 포크 커틀릿이라는 음식이 일본에 건너와 밥과 함께 먹는 음식으로 변형되었고, 이것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우리가 먹는 돈가쓰가 된 것이다. 돈가쓰란 이름은 돼지 돈豚과 커틀릿의 일본식 발음인 카츠가 합쳐진 말이다. 





카레 역시 마찬가지. 인도에서는 화덕에서 구운 빵인 '난'과 함께 먹지만, 일본에 건너와 밥과 함께 먹는 음식으로 변형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향신료가 가미된 인도식 카레보다 우리 입맛에 맞게 변형된 일본식 카레가 더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전파되었기에 우리가 먹는 카레는 일본식 카레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전파된 서양음식은 많이 있다.
아무래도 개화가 우리보다 빨랐고, 개화기 이전에도 꾸준히 네덜란드와 교류해온 일본이었기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이전부터 서양음식이 유입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개화기에 서양문물이 전파되었지만 그 시기에 강화도 조약이란 이름으로 급속하게 일본의 영향 아래로 편입되어 서양문물의 유입은 대부분 일본을 거쳐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 역시 무작정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에도시대에는 우리와 같은 쇄국정책을 취했으며 네덜란드와의 교류도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곳 딱 한 군데만 허가해 두었다. 서양인들은 데지마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일반인들은 허가없이 절대 서양인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서양음식 전파에 있어 나가사키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일본 최초의 개항장이자 외국인 집단 거류지가 있던 나가사키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외래 문물이 많이 유입되었다.
사람이 들어오면 문화가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오면 그에 따라 음식이 들어오기 마련.

나가사키가 원조인 대표적인 음식 4가지를 이곳에서 소개한다.
현재 우리에게 친근한 외래 음식이 대부분 나가사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기에 흥미롭다.





그 첫번째 카스테라
-전래시기/ 16세기-


나가사키에 전해져 오는 외래음식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가사키 카스테라.
16세기 포르투갈과 교역할 당시 카스티야 지방의 스펀지케이크가 전해진 것이 현재의 카스테라다.
나가사키의 카스테라는 서양에서 직접 전래된 오리지널로, 개화기 시절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로 전파되었다.
나가사키 어디를 가나 맛있는 카스테라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중 분메이도(文明堂)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일본 전역에 분점을 가지고 있다.








그 두번째 짬뽕
-전래시기/1890년대-

메이지시대 나가사키에 지금도 있는 중화요리점 시카이루(四海樓)의 주인 진평순이 당시 어려운 형편의
동포 유학생들을 위해 인근 화교 식당에서 쓰다 남은 닭이나 돼지 뼈, 양배추를 한데 모아 국물을 우려내고
국수를 말아 준 것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즉, 일본 토종요리가 아니라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요리다.

우리나라에서 짬뽕이라 하면 '뒤죽박죽' '잡탕' 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일본에서도 그 의미는 같으며 양배추, 고기, 생선 등 이것저것 섞어 넣었기 때문에 '짬뽕'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만 벌건 국물에 얼큰한 맛이 나는 우리나라 짬뽕과는 달리
돼지뼈나 닭고기로 우려낸 국물에 걸쭉하고 담백한 맛이 나는 것이 우리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세번째, 사세보 버거
-전래시기/1950년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 본토에 미군들이 상륙한다.
나가사키와 인접한 사세보는 여차하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향할 수 있는 전략상 요지로, 이곳에
미해군기지가 건설됨과 동시에 엄청난 수의 미군들이 몰려든다. 그에 따라 해군기지 주위로 미군들을 상대로한
술집, 상점, 거리가 형성되는데 그런 시대배경에서 사세보 버거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국의 전초기지였던 사세보는 호황을 누리게 되는데 이즈음 일본인이
직접 미군부대에서 레시피를 배워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사세보 버거는 사세보에서 만드는 수제 햄버거의 총칭으로, 맥도날드처럼 하나의 레시피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게마다 만드는 방법과 맛이 다르다. 특히 일반적인 햄버거와는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크기로
유명한데, 부가적인 메뉴없이 햄버거 하나만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








마지막, 토루코 라이스
-전래시기/1950년대-

나가사키 음식의 잡탕(?)문화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음식이 이것말고 또 있을까?
토루코 라이스는 카레향을 곁들인 볶음밥에 스파게티와 돈까스를 얹은, 언뜻보면 학생식당에서
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음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먹어보면 상당히 맛이 있으며 토루코 라이스에
대한 나가사키 시민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꽤나 미묘한 하이브리드(?) 음식인데 어째서 '터키'라는 뜻의 '토루코'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1. 터키기원설
터키에는 '피라후'라는 볶음밥 요리가 있는데, 이 요리와 비슷해서 '터키풍 라이스' = '토루코 라이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메인요리가 볶음밥이었고, 스파게티와 돈까스는 후에 장식용으로 곁들여졌다고.

2. 터키 가교설
토루코 라이스의 내용물 중 볶음밥이 중국을, 스파게티가 유럽을 대표하는 요리이고 거기에 돈까스가 곁들여져
가교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에서 중국과 유럽의 중간에 있는 터키를 요리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3. 프랑스 국기 유래설
프랑스의 삼색기를 의미하는 '토리코롤'이라는 단어가 '토루코'로 축약되었다는 설이다.
볶음밥, 돈까스, 스파게티의 세가지 요리가 조화를 이루어 프랑스의 삼색기와 비슷하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4. 가게명칭설
종전후~소화 30년까지 나가사키시내에 존재했던 '토루코'라는 레스토랑이 기원이었다는 설.




이상으로 살펴본 음식들은 나가사키 시내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 대부분의 문화가 그러하듯, 이들 음식들도 원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일본인의
개량과 독자적인 비법을 곁들인 끝에 현재는 '완전한 일본음식'으로 편입되었다.

인생의 반은 먹는 즐거움이라고 하니, 나가사키에 들른다면 위에 소개한 음식들을 한번 즐겨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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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개미 2009.02.14 1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까스 포크커틀릿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것.

    에도 바쿠후를 열었던 도쿠가와 튀김을 많이 먹고 콜레스테롤 과다로 사망

  3. dsdsd 2009.02.14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론

    포크커틀릿. 원산지 서양

    카레. 원산지 일본

    카스테라. 원산지 포르투갈

    짬뽕. 원산지 중국

    햄버거. 원산지 미국

    도루코라이스. 원산지 터키

    결국일본껀 없네 ㅡ.ㅡ

  4. 히로시마보이 2009.02.14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나름대로의 장점이죠.. 일본인들이 본래 왕성한 호기심을 국력증강에 많이 활용했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먹어보고 맛있으면 일본에 가지고 와서 일본화합니다. 폐쇄적이기 쉬운 섬나라가 세계적 대국이 된 바탕에는 바로 이렇게 잠시도 가만 안 있고 돌아댕기면서 이것저것 조사하고 받아들이는 습성 때문입니다.

  5. 요암 2009.02.14 2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ㅡ_ㅡ 이런거 말구 우리나라 음식 좀 소개해주세요~ 이런건 어느 블로그에서나 볼 수 있어요.!!!
    다른나라의 음식을 일본화해서 약싹빠르게 자기네 음식이라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웃기지만 김밥에 닭꽝빠지면 그게 김밥이냐고 성질내는 사람들이 더 이해안가네요.

  6. dma.. 2009.02.14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짬뽕은 처음 듣는군요.. ㅎㅎ 신기합니다.

    그런데 카레 유래야 일본을 거쳤던 어쨌던

    지금 한국에서 먹는 카레는 일본식 카레 하고는 차이가 있는것 같은데요

  7. aSD123 2009.02.14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고로케도 외국에서건너와 일본으로 전파된것 아닌가여???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본것같은데..,...

  8. 사회과부도 2009.02.14 2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도가 무슨 "서양"이야? 중국, 터키는 또 어떻고?

  9. ^_^ 2009.02.14 2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예전에 네이버 인조이재팬 음식문화 게시판은 가끔 들리곤 했었는데요.

    어떤 한국분이 돈까스와 김밥 사진을 올려놓고 점심으로 먹은 것이라고 하니
    한 일본인이 "일식을 점심으로 드셨군요"라는 내용의 댓글을 달아놓았더군요.

    서양의 포크커틀렛이 넘어와.. 새로 만들어졌다고 하기보다 이름만 일본식으로 새로 붙였다고 하는 것이 맞는 '돈까스'는 일본음식이고,
    500년 전부터 먹던 김에 계란지단도 넣고, 시금치도 넣고 이것저것 넣다가 단무지를 넣고 완성된 '김밥' 또한 일본음식이라던
    일본인의 희한한 사상이 정말 우습고 같잖더군요.

  10. elmar 2009.02.14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도음식 카레, 난하고만 먹는거 아니에요. 인도식 쌀에 같이 먹기도 합니다. 선택이라고나 할까요.
    인도지방에 따라 밥을 더 많이 먹는지방이 있고 덜 먹는 지방이 있긴 하나 인도 쌀이 일반적인 기본음식인 나라입니다.
    수정해주세요~
    카레가 우리나 일본입맛에 맞게 덜 강하게 변화된건 사실이나 밥은 일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는거~^^

  11. 지나가다 2009.02.14 2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보니 '다깡이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김밥이 일본음식이라는 헛소리가 있는데 한마디로 웃깁니다. 김밥에 다깡 안 넣고도 얼마든지 쌀 수 있고요, 수많은 재료들 중에 한 가지가 일본음식이라서 그 전체가 일본음식이라니 허참

  12. 지나가다 2009.02.14 2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햄버거 샌드위치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건 전혀 설득력이 없네요

  13. 지나가다 2009.02.14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단무지가 일본음식이라는 것도 확실하진 않다더군요. 우리나라 전통 음식중에도 단무지가 있었는데 일본에도 있던 단무지가 널리 퍼지면서 일식 단무지가 한식 단무지를 더어버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이 글과는 상관없지만 오뎅도 어묵과는 다른 음식입니다. 한식 전통요리에 어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뎅은 사실은 어묵이 아니라 어묵튀김이죠.

  14. 인도는서양 2009.02.14 2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도도 서양 중국도 서양 터키도 서양
    일본도 서양 한국도 서양

    동양인 ㅉㅉㅉ

  15. 인도는서양 2009.02.14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 주인장님이 일본분이신가봐여..

    서양과 외국의 차이를 잘 구분못하시는 듯...

  16. Favicon of https://likejp.com BlogIcon 베쯔니 2009.02.14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에서 건너간 일본 음식을 살펴 보아도 좋을것 같습니다~

  17. 마라도나 2009.02.14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쿠앙 자체가 절임 음식이잖아요!

    일본 고문헌에도 절임 음식은 한국에서 온거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우리가 요즘 마시는 사케도 우리나라에서 넘어가서 꽃은 일본에서 피운 셈입니다

    물론 지금의 절임야채나 사케의 다양성과 고급화는 일본에서 이루어 졌지만 ....

    위에 다꽝?? 참나....당신이 말하는 다꽝이 일본거라고 쓰기전에 타쿠앙이 뭔지 그리고 어디서

    건너온 음식인지 알고나 글쓰세요....

    암튼 김밥은 일본에는 없어요(물론 있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일본 전통음식은 아닙니다

    • Favicon of http://omoshiroist.tistory.com BlogIcon 어웅 2009.02.15 1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국 말씀을 종합하면
      사케나 우메보시나 다쿠앙이나 일본음식이네요.

      이런게 전통음식이 아니면
      우리나라 전통음식은 뭐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음식의 전통과 성격을 파악하는 기준에
      국가와 민족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네요.

      그냥 한국과 일본이 오랜 역사가 흐르면서
      영향을 주고받아서 혈통도 제일 비슷하고
      음식문화도 비슷하다 생각하면 되는거지
      (서양에선 물고기 회떠먹는 건 생각도 못하니까)

      꼭 이런 사람들이 또
      한국이랑 일본이랑 엄청 비슷하다고 하면 화내더라.

  18. afsd 2009.02.14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김치도 일본꺼겠네..임진왜란이후....고추가루가 들어왔으니 그걸쓴 음식은 다...일본꺼냐 ㅋㅋㅋ
    나 참 웃겨서....솔직히 말해서
    김밥 보고...일본음식이라고 자폭하는애 보고 너무 웃겼다..
    그럼 일본도 돈까스며 뭐며 일본음식하나 없겠네..나참나..
    ㅋㅋㅋㅋㅋㅋㅋ 저렇게 귀엽고 무식할수가....풋
    일본 샤브샤브도 중국의 훼궈니깐 일본꺼 아니고..뭐야 대체..
    하여간 인간들이웃겨..풋...음식이란게 다 보면 비슷비슷하고
    서로 전해지고 발전한 음식이 많은거지...무슨......ㅋㅋㅋㅋㅋ

  19. 이다 2009.02.15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한 건 가요?
    음식의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많기 떄문에...

  20. Favicon of http://omoshiroist.tistory.com BlogIcon 어웅 2009.02.15 16: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 그리 따지려 드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주제에 대해 매번 왈가왈부하시는 분들은
    (특히 뭐 일본음식은 다 원래 한국음식이다 라든지)
    '영향을 받았다'와 '누가 누구한테 가르쳤다', '전해줬다'를 동의어로 보시는 건지 퍽 궁금하네요.

    처음부터 내가 원조인 것이 어디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비롯한 사람만 해도 원래 자기 생각만 평생 가지고 살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이런 방법은 내가 너한테 알려줬네 이건 니가 먼저 했네 따지면서 삽디까?
    다 같이 지내면서 가까이서 보고 따라도 해보고 섞어도 보는거지
    주부들이 생활의 지혜같은거 공유할 때 이건 누구네 엄마가 전세계 최초로 한건데..
    아냐 그게 아니라 원래 서양 어디 폴란드에서 보로스키씨가 개발한거래 이럽니까?
    서로 다 주고받으면서 발전하는거 아닙니까

    김치에 쓰이는 고춧가루가 고려시대엔 없었으니 김치는 한국음식아닙니까?
    고추가 쓰이는 원산지 추적해야 되는겨? 김치 멕시코 음식?

    그냥 김밥은 한국음식, 카츠는 일본음식이라고 보면 되는거 아니요?
    서양음식 중에 빵가루 넣어 튀겨먹는 고기를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카츠를 만들때 서양에서 영향을 받았어도, 이제 포크 커틀릿하면 서양식 커틀릿 떠올리나요?
    이미 일본식 카츠의 영역(영문 번역)명칭으로 뒤집어졌는걸. 그러니 일본음식이라고 봐야죠.

  21. 박혜연 2010.01.25 1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에서 처음 전해진 서양음식이 바로 카스테라였다니... 놀랍네요? 그것도 16세기였으니...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반경 2km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7만 3천여 명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갔다.
원래 나가사키는 예정지가 아니었으나 실제 목표였던 고쿠라(현재의 기타큐슈) 상공에 낀
구름으로 인해 목표확보가 어려워지자, 돌아오는 길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려버렸다고 한다.
어찌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할 수 있다.


나가사키는 지하철 대신 노면 전차가 발달한 도시다.
마츠야마쵸(松山町) 전차역에 내려 공원계단을 올라가면 평화공원에 도착한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이곳은 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전하기 위한 수학여행 코스로 많이 찾기 때문인지, 이곳은 늘 학생 단체들로 붐빈다.

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샘' 이라고 해서 원폭투하 당시 목마름에 괴로워하며 숨을 거둔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평화의 샘에서 정면으로 걸어가면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청동 기념상'이 있다.




▶ 1955년 원폭투하 10주년을 기념하여 완성된 평화 기념상.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펼친 왼팔은 평화를, 가볍게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한다.



평화 기념상 양 옆에는 종이학을 진열한 조그만 탑이 있다.
나가사키는 물론, 히로시마의 원폭기념공원을 가도 이렇게 전국에서 보내온 종이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종이학과 원자폭탄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사다코와 천 마리 종이학'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10년 후, 어린 사다코는 방사능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린다.
사다코는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기 시작하지만, 미처 천 마리를 다 접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일본 전국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만다.
그리고 어린 사다코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 하며 전국 각지에서 종이학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 '평화기원'이라는 피켓과 함께 공원 주변에는 매년 일본 전국에서 보내오는 종이학이 장식되어 있다.
사다코 이야기는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작용해 원폭=종이학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 평화공원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원폭낙하중심지에 다다른다. 사진에 보이는 검은색 기둥 500m 위에서
원폭이 터졌다고 한다. 설명글에는 과거 말뚝으로 표시해둔 폭심지의 자료사진이 남아있다.






▶ 근처에는 사다코와 관련된 동상도 전시되어 있다. 사다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캐나다 작가
앨리노 코어가 쓴 작품이다. 실제로 사다코는 죽기 전까지 1300마리의 종이학을 접었지만, 이야기의 감동을
주기 위해 644개만을 접은 채 숨진 것으로 각색했다고 한다.


원자폭탄과 종이학을 결합시킨 것은 일본인 특유의 낭만이 작용한지도 모른다.
아니면 캐나다 작가가 쓴 소설을 일본인 자신들도 원폭의 피해자라는 면은 부각시키기 위해 재빨리 차용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가사키는 분명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이고, 지금도 원폭이 떨어진 오전 11시 2분이 되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종이 울린다. 우리가 일본인의 낭만에 고개를 끄덕일 이유는 없지만, 다만 이 이야기가
원자폭탄 유적지에 가면 왜 그렇게 종이학이 많이 있는지에 대한 답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다만 현재도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 원폭피해자들에게는 종이학 대신 성금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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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usinessman.tistory.com/ BlogIcon 짝짝 2009.01.16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첨에는 종이학이아니라 그냥 끈인줄 알았다는 ㅋㅋ
    신기하네요..흠.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1.16 1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저도 멀리서 봤을 때는 종이학인줄 몰랐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종이학이길래 자료를 찾아봤더니 저런 사실이 있더라구요~

  2. 디스키플루스 2009.02.04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 공원은 퍽 불쾌합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받았습니다.
    저 공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원폭이 낳은 참혹한 피해를 보여주면서 왜 일본이 원폭을 맞게 되었는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것 같더군요
    일본제국주의가 전쟁범죄를 저지르며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는 광기에 결국 저렇게 되었다라고 가르치는 자세도 필요한것같은데요
    뭐 수정주의바람이 우익의 지원아래 서서히 부는것을 봐선 그렇게 역사를 똑바로 마주보고 가르치는 일본을 보기는 어려울것같군요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2.04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맞습니다. 일본은 인과응보라는 말을 잊은 것 같더군요. 가고시마에 가면 가미가제 특공대 박물관도 있답니다. 나중에 따로 포스팅할 예정이니 그때도 들려주세요~











▶유후인 관광을 끝내고 다시 버스 터미널로 돌아와 나가사키까지 가는 버스를 탑니다. 거듭 말하지만, 역이나 터미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다음에 자기가 타고 갈 교통편의 시간을 체크한 다음, 그에 맞게 일정을 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후인에서 나가사키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편 없기 때문에 이곳 창구직원에게 부탁해 전화로 예약한 다음 시간에 맞춰 정류소까지 가야합니다.




▶이제부터 산큐패스를 이용한 새로운 코스의 발굴입니다. 나가사키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유후인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이곳 미치노에키(道の驛)라는 유후인 인터체인지 근처에 있는 조그만 정류소까지 와야합니다. 제 경우에는 창구직원분이 이곳까지 가는 버스를 알려주셔서 얻어타고 왔지만, 버스가 없을 경우 택시를 타고서라도(요금 1,000엔 남짓) 와야 합니다.






▶제가 예약한 버스는 나가사키 역 앞까지 가는 12시 56분 버스였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2시간 마다 한 대 꼴로 버스가 옵니다. (버스가 무려 20분이나 연착해서 아주 조마조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 시간 정도 달려가면 나가사키 역 앞 현영(縣營) 버스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육교 맞은 편에는






▶나가사키 역이 있습니다. 후쿠오카와 가고시마에 이어 규슈 제 3의 도시가 바로 나가사키입니다.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

▶벌써 오후 5시가 가까웠기 때문에 관광지도를 보고 한 군데만 찝어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오란다자까. 나가사키는 에도 시대 쇄국정책을 펴던 시절 외국인에게 열어 놓은 유일한 무역항으로, 이 길은 예전 주 무역 대상이던 네덜란드 사람(오란다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통하던 길입니다.








왜 네덜란드를 오란다라고 부를까?

네덜란드는 다른 이름으로 홀란드(Holland)라고도 하는데, 이 홀란드의 발음이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편한 방식으로 바뀐 것이 ""오란다"" 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국민들은 한국이라고 부르지만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란다자카에 실제로 가보면 여행안내서에서 보던 그런 운치있는 분위기는 나지 않습니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끊임없이 변해왔으니까요. 거리 근처에는 유치원과 중학교가 있어 하교길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란다자카를 내려가면 공자묘가 나옵니다. 나가사키에 살던 화교들이 만든 사당으로 매년 공자의 기일이 다가오면 대대적인 행사와 함께 제사를 올립니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인도 많이 살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국인도 많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나가사키 짬뽕 등 중국 음식이 발달했습니다.






▶그라바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유명한 카스테라점도 있습니다. 나가사키 짬뽕과 함께 유명한 것이 카스테라인데, 나가사키 어디를 가도 쉽게 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전통있는 가게에서 사는 편이 더 맛있을 것 같죠. 시식만 하고 안 사고 나와도 괜찮으니 한번 들려보세요.






▶나가사키는 일본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이국적인 풍경이 많습니다. 특히 지금은 나가사키 사루쿠 행사(2006. 4~2006.10) 기간이기 때문에 곳곳에 사루쿠 깃발이 꽂혀 있습니다.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글로버 정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오우라 천주당이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으로, 특히 햇빛이 비치는 날 내부에서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이 아주 멋집니다. 연인끼리 두 손 꼭잡고 올라가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








글로버 정원(グラバー園)

▶글로버 정원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걸어서 올라가면 조금 힘들고 사진에 나오는 움직이는 보도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합니다.






▶이곳은 또 오페라 ""나비부인"" 의 배경이 된 곳으로 더 유명합니다. 정원 중앙에는 나비부인에서 가장 많은 주연을 맡았던 미우라 타마키(三浦環像)의 동상이 있습니다. 저택의 주인이었던 글로버의 부인이 손님을 대접할 때 나비무늬 옷을 자주 입고 있던 것에 착안해 제목을 ""나비부인"" 이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물론 오페라는 모티브만 따왔을 뿐 실제 글로버 부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줄거리-

집안이 몰락하여 기녀가 된 나비아가씨는 미국 선원 핑가튼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핑가튼은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주위에서 재혼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아이와 함께 기다리던 어느날 핑카튼이 탄 배가 입항한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재혼한 부인 케이트가 있었고, 모든 것을 알아차린 나비부인은 아들을 게이트 부인에게 맡기고 단도로 자결하고 만다.




...는 비극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인이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요.






▶저택의 주인 토마스 브레이크 글로버의 흉상입니다. 그는 나가사키 개항과 동시에 일본에 와서 글로버 상회를 열고,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 이토 히로부미 등 개화를 부르짖은 일본 젊은이들을 음지에서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고 73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나가사키시 사카모토 국제 묘지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주인이 사망한 후 격동의 세월을 거쳐 현재는 나가사키 시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잘 정비한 탓에 현재는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관광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인 글로버가 살던 저택에서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간이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때마침 일몰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글로버 정원에서는 나가사키 항구의 멋진 야경이 한 눈에 보입니다.






▶호텔 근처에서 먹은 나가사키 짬뽕은 책자에 실린 사진 그대로입니다. 라면과 같은 면에 국물은 라면보다 담백한 맛이 납니다. 같은 짬뽕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짬뽕과는 전~혀 다릅니다. 색깔만 봐도 얼큰함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나가사키에서의 첫 날 일정은 마쳤습니다.








일본 26성인 순교지(日本26人聖人殉敎地)&후쿠사이지(福濟寺)

▶이틑날 일정은 나가사키 역을 기점으로 시작합니다. 나가사키 역 근처에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일본 26성인 순교지와 후쿠사이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곳 성 필리포 교회를 경계로 왼쪽이 순교지, 오른쪽이 후쿠사이지 방향입니다.






▶일본 26성인 순교지는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에 일본인 최초의 선교자 26명을 처형한 곳입니다. 사진과 같이 그 중에는 2명의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 후 1862년에 로마교황이 이들 26명을 성인의 명단에 올려 주었고,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62년에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26성인 기념관과 성 필리포 교회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교회 건너편에는 대형 관음상이 인상적인 후쿠사이지가 보입니다. 여기에는 또 남다른 사연이 숨겨져 있는데, 이 절이 창건된 1628년은 기독교 박해가 한창 심하던 때로, 누구든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때 이곳에 살던 중국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야만 했는데, 그 대안으로 이 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후쿠사이지 입구에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석조물들이 많습니다.






▶후쿠사이지 입구에는 종이 세워져 있는데 매일 11시 2분이 되면 타종을 합니다. 1945년 8월 9일 바로 그 시간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실제 들어보면 매우 엄숙하게 들립니다.






▶후쿠사이지 주변 언덕은 모두 이런 봉안당(납골당이란 용어는 일본식 표현으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습니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이곳에서부터 가운데 오밀조밀한 회색을 띄고 있는 부분이 모두 봉안당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집단 봉안당은 일본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메가네바시(眼鏡橋)

▶나카시마 강에는 도쿄 황거에 있는 것과 비슷한 메가네바시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이 외에도 13개의 아치형 돌다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메가네바시입니다.








소후쿠지(崇福寺)

▶메가네바시를 건너가면 수많은 절이 밀집해 있는데, 그 중 이 소후쿠지(崇福寺)는 1629년 복건성 출신의 중국인들이 세운 절입니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세운 절답게 입구의 붉은 산문이 인상적입니다.








코후쿠지(興福寺)

▶이 절 역시 1620년에 중국 승려가 세운 절로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스와진쟈를 비롯 많은 절과 신사가 부근에 밀집해 있으므로 선사(仙寺) 유람을 즐기시는 분에게는 좋은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평화공원(平和公園)

▶전차를 타고 마츠야먀쵸(松山町) 역에서 내리면 평화공원이 나옵니다. 평화공원에는 높이 10m의 평화기념상이 있는데, 하늘을 가리킨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펼친 왼팔은 평화를, 가볍게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하네요.






▶평화기념상 양쪽에는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종이학이 걸려 있습니다. 매년 일본 전역에서 보내 온다고 합니다.






▶근처의 나무에도 종이학이 걸려 있어 애처로워 보입니다.






▶이곳이 원폭 낙하 중심지입니다. 원폭이 떨어지고 난 후 누군가가 말뚝을 박아 폭심 중심지임을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들은 불쌍하지만, 전쟁을 일으켜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일본 쪽도 많은 반성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엄숙한 분위기로 자신들만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점도 인정해야합니다.






▶평화공원 안에는 원폭이 떨어진 일시가 적힌 기념상이 있습니다. 히로시마가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나가사키가 동년 8월 9일 11시 2분입니다.








데지마(出島)

▶데지마는 에도 막부 시절 유일하게 개항했던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류지입니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고 기독교 선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막부는 이곳에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외국인들(주로 네덜란드 인)을 격리 수용시켰습니다. 현재는 주변을 매립시켜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하나의 통로로만 연결된 섬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네덜란드와 무역을 한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게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지 말라는 막부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당시 유럽에서는 구교와 신교 간에 극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고, 신교(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기독교의 계율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신교는 부의 축적을 긍정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에 임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타고 왔던 범선입니다. 당시는 항로가 개척되지 않아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와 중국을 거쳐 장장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겨우겨우 일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인들이 전한 학문을 난학(蘭學)이라고 하는데, 그 중 가장 유용했던 것이 의학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외과수술을 하는 장면을 일본식 그림으로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데지마 안쪽에는 에도시대의 데지마를 축소한 모형이 있습니다. 앞부분에 보이는 다리가 육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 다리가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면서 폐쇄되었습니다. 원래는 이쪽을 통해 유일하게 왕래가 자유로웠던 일본인. 유녀(遊女)들이 출입했다고 합니다.








데지마 와프

▶데지마 맞은 편에는 복합 쇼핑센터 데지마 워프가 있습니다. 바다쪽으로 150m 정도 되는 테라스를 설치해 아름다운 나가사키 항의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밤에 가는 것이 볼 거리가 훨씬 많습니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쉬기 좋은 장소입니다. 물론 데이트 코스로도 안성맞춤.








나가사키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데지마에서 가이드를 해준 할아버지입니다. 제가 찾았던 시기는 나가사키 사루쿠 행사가 한창이라 주민들이 자원봉사 가이드를 해 주고 있었는데, 절반 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저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시며 열심히 설명해 주시던 열정적인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덕분에 ""그냥 이런 건물이 있구나"" 정도로 끝났을 데지마가 제 머리 속에 확실히 박혔고 책에서도 얻지 못했던 생생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 하나 때문에 그 도시나 나아가 그 나라 자체의 이미지가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도시의 대표, 나라의 대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부러웠습니다. 이런 점은 정말 배웠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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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에서 관광이 끝나는 도쿄나 오사카와는 달리 규슈는 관광지가 전 지역, 각기 다른 도시에 퍼져 있기
때문에 열차나 버스를 이용해서 매번 옮겨 다녀야 된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교통비의 부담이 심한 편. 하지만 이런 여행자의 고충을 덜 수 있도록 규슈지역에는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교통패스를 잘 구비해 놓고 있다.

만일 후쿠오카-나가사키나, 후쿠오카-유후인 등 한 도시만을 왕복한다면 패스를 구입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교통비를 지불하는 것이 더 낫지만, 두 도시 이상을 왕복할 경우 패스를 구입해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자 그럼, 규슈 지역을 여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패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산큐패스 북부권

JR열차나 전철이 발달한 타지역과는 달리, 규슈는 버스노선이 발달되어 있다.
산큐패스는 적극적인 규슈 지역 관광유치를 위해 규슈내 46개 버스회사가 합작해 만든 패스로
따스한 규슈의 이미지인 '태양'과, 3일 동안 사용가능하다는 의미(숫자 3의 일본어 발음이[san]이다)가
함축된 'SUN'과 규슈의 '큐'를 알파벳으로 표시한 'Q'를 조합해 산큐패스라 이름지었다.

3일간 무제한으로 규슈 대부분 지역의 고속버스와 시내버스를 탈 수 있으며
북부 5개현(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오이타, 구마모토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산큐패스-북부와
미야자키, 가고시마현을 포함한 규슈 전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산큐패스-전규슈 두 종류가 있다.
가격은 북부규슈권이 6,000엔, 전규슈권이 10,000엔이다.

각각 주황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며 아무래도 규슈 북부에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고, 3일만에 규슈 전지역을
다 돌기는 무리가 있어 전규슈권보다는 북부규슈권이 많이 팔리고 있다. (물론 가격적인 메리트도 한 몫한다.)
 
국내 각 여행사나 일본 현지 주요 버스센터에서 구입할 수 있는데, 구입할 때 사용할 날짜를 스탬프로
찍어주기 때문에 일정을 고려해서 잘 결정하고 이야기하도록 한다. (날짜는 한 번 찍히면 못 바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산큐패스-북부규슈권. 앞면에 날짜를 찍어주기 때문에 내릴 때 운전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 버스센터에서 산큐패스를 제시하면 고속버스 예약도 가능하다. 일본의 고속버스는 자리 여유가 많은 편이지만
혹시라도 걱정된다면 전날에 지정석을 예매해두자.






▶산큐패스로 탈 수 있는 버스는 앞면에 스티커가 붙어있다. 왼쪽은 북부규슈와 전규슈권으로 탈 수 있는 버스.
오른쪽은 전규슈권으로만 탈 수 있는 미야자키현의 버스.





2. JR규슈레일패스-북부큐슈권

JR규슈레일패스는 산큐패스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고, 산큐패스가 발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규슈여행의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산큐패스와는 달리 3일권과 5일권 중에서 선택할 수 있고, 지역한정없이 규슈 전지역의
철도 노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다만, 가격에 있어 3일권이 12,000엔, 5일권이 15,000엔으로 10만원을 훌쩍
넘어 여행자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거의 절반가격인 산큐패스를
구입하는 여행자가 늘어났다.

하지만 2008. 1. 18부터 지역을 북부 5개현으로 한정한 JR규슈레일패스 3일권이 7,000엔이라는 저렴한
요금으로 발매되면서 산큐패스의 판매량을 맹추격하기 시작했다.





▶ 왼쪽은 JR규슈레일패스를 구매했을 때 받는 교환권. 오른쪽이 실제 JR규슈레일패스-북부큐슈권의 실물 사진이다.
국내 여행사에서 구매했을 받게 되는 것은 교환권이며 실제 패스가 아니므로 주의할 것! 교환권을 가지고 일본 현지에
가서 JR역에 있는 JOY ROAD여행사 '미도리노 마도구치'에서 실제 패스로 바꾸어야 한다.






▶ 후쿠오카 하카타역에 있는 미도리노 마도구치의 모습. 교환권과 여권을 창구 직원에게 주면 실제 JR규슈레일패스를
발급해 준다.






▶ JR규슈레일패스-북부큐슈권으로 탈 수 있는 노선. 규슈의 명물인 유후인노모리나 특급 하우스텐보스 등
대부분의 노선을 이용할 수 있다.






▶ 후쿠오카와 하우스텐보스를 직행으로 연결하는 특급 하우스텐보스호. 일본의 열차는 노선별로 디자인도
다르고 각각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골라타는 재미도 크다. 개찰구 별도의 창구에서 JR규슈레일패스를 보여주면
바로 통과할 수 있고, 탑승한 후에는 차장이 표를 검사하러 오는데 그때 다시 한번 패스를 보여주면 된다.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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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반경 2km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7만 3천여 명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갔다.
원래 나가사키는 예정지가 아니었으나 실제 목표였던 고쿠라(현재의 기타큐슈) 상공에 낀
구름으로 인해 목표확보가 어려워지자, 돌아오는 길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려버렸다고 한다.
어찌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할 수 있다.



마츠야마쵸(松山町) 전차역에 내려 공원계단을 올라가면 평화공원에 도착한다.
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전하기 위한 수학여행 코스로 많이 찾기 때문인지, 이곳은 늘 학생 단체들로 붐빈다.
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샘' 이라고 해서 원폭투하 당시 목마름에 괴로워하며 숨을 거둔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평화의 샘에서 정면으로 걸어가면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청동 기념상'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55년 원폭투하 10주년을 기념하여 완성된 평화 기념상.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펼친 왼팔은 평화를, 가볍게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한다.





평화 기념상 양 옆에는 종이학을 진열한 조그만 탑이 있다.
나가사키는 물론, 히로시마의 원폭기념공원을 가도 이렇게 전국에서 보내온 종이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종이학과 원자폭탄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사다코와 천 마리 종이학'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10년 후, 어린 사다코는 방사능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린다.
사다코는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기 시작하지만, 미처 천 마리를 다 접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일본 전국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만다.
그리고 어린 사다코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 하며 전국 각지에서 종이학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 '평화기원'이라는 피켓과 함께 매년 일본 전국에서 보내오는 종이학이 장식되어 있다.
사다코 이야기는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작용해 원폭=종이학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 평화공원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원폭낙하중심지에 다다른다. 사진에 보이는 검은색 기둥 500m 위에서
원폭이 터졌다고 한다. 설명글에는 과거 말뚝으로 표시해둔 폭심지의 자료사진이 남아있다.






▶ 근처에는 사다코와 관련된 동상도 전시되어 있다. 사다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캐나다 작가
앨리노 코어가 쓴 작품이다. 실제로 사다코는 죽기 전까지 1300마리의 종이학을 접었지만, 이야기의 감동을
주기 위해 644개만을 접은 채 숨진 것으로 각색했다고 한다.





▶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차분한 모습이다. 첫번째 원폭투하 도시로서의 상징 때문인지, 히로시마가
온전히 '원폭의 도시' 라는 이미지를 가진 데 비해  나가사키는 원폭보다는 '일본 최초의 개항장',
'일본에서 가장 서구적인 도시' 등의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가사키는 분명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이다.
현재에도 원폭으로 허물어진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도심에 있는 사찰 '후쿠사이지'에서는
원폭이 떨어진 오전 11시 2분이 되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종이 울린다.

하지만 '원폭투하 도시'라는 오명(?)을 씻을만큼의 관광지와 문화가 나가사키에 많이 있다.
최초의 개항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 아기자기한 유럽식 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으로
불려질 만큼 완벽한 국제 관광도시로 탈바꿈했다. 이제 원폭의 이미지보다는 규슈 최대 관광지로서의 나가사키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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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ceman 2008.10.06 0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없고 불쌍한 우리조선민중들,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민중들만 힘들고, 배고프고, 멸시와 천대의 타국에서 어처구니 없게도 원폭으로 사망. 그런데도 일본은 그런 자신들 잘못을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미국보고 원폭투하 했다고 지랄하는 나라. 평화공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채 서있는 조선인 원폭 사망비.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1. 시작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인도를 찾아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데 가장 앞장선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희망봉을 발견하고, 인도를 거친 포르투갈의 무역선은 머나먼 동쪽나라 일본에 이르렀고
마침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던 전국시대에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전해주게 된다.

전국시대에 유입된 조총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고,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막판에 어처구니 없는 배신으로 전국통일이라는 과실은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돌아갔지만...




다만 포르투갈은 무기만 수출한 것이 아니었다.
조총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선보이게 되니 이것은 교리 자체가 참으로 신선한 사상이었다.

천황보다 위에 있다는 하나님과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은 막부에게 있어서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게 되고, 세력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게 된다.

실제로 1637년 시마바라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천주교 탄압에 짓눌린 백성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했고, 여기에 가담한 천주교 신자만 3만 7천명에 달했다.

결국 진압되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에도 정부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실감했고
일본 국내에서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명물이 된 카스테라는 스페인의 스펀지케이크가 전래된 것이다.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만들어 먹던 빵이라고 해서 '카스테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26인 성인순교지.
자세히 보면 두 명의 나이어린 소년도 눈에 띈다.





2. 포르투갈 다음으로 일본에 접근한 네덜란드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 네덜란드가 접근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 속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신생국가였기 때문에 구교였던 포르투갈과는 대립관계였다.

이들은 구교인 천주교의 악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압적으로 포교하려고 하지 않았고, 칼뱅의 실용주의를
따라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나라였기에, 상업과 종교를 엄격히 분리한 에도 정부의 조건에 순순히 응해왔다.

하지만 크게 당한(?) 적이 있던 에도 막부는 이들이 혹시라도 기독교를 전파할까 싶어
에도에서 먼 규슈의 어촌 나가사키를 통해서만 교역할 것을 허가했고,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인들의 집단 거류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데지마'다.

데지마는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인공섬으로 육지와는 달랑 다리 하나로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고,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비록 서양인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나가사키 시민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를
뜻하는 홀랜드(Holand)를 일본어로 발음해 '오란다상'이라고 불렀다.

이 오란다상이라는 명칭은 이후에 코가 크고 피부가 하얀 백인들은 총칭하는 단어로 발전해, 그들이
다니던 거리를 '오란다 자카'라고 부르는 등, 서양인의 대명사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섬 데지마.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었지만 에도시대만 해도 단 하나의 통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고립된 섬이었다.






▶데지마에 있는 유적에는 'VOC'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로고가 남아있다.






▶네덜란드인들이 거닐던 오란다 자카. 반듯하게 정비된 이곳 주변에는 현재 학교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3.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꽃핀 학문, '난학'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데지마를 중심으로한 네덜란드의 학문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측량술, 조선술 등 수많은 서양식 학문이 전해졌는데, 이중 일본인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외과수술이었다.
당시의 의학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한방이 전부여서 기껏해야 침을 놓는 것이 전부인
동양의학의 입장에서 실제로 살을 찟고 뼈를 자르는 서양의 외과수술은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데지마를 출입하던 일본 지식층을 통해 전파되었고, 여러 난방의(蘭方醫)들의 노력으로 1774년에는
일본 해부학의 신기원을 마련한 '해체신서'가 발간되기에 이른다.

난학을 통해 축적된 지식은 개화기 시절 새로운 학문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난학을 공부한
사람 중 탈아입구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기도 한다. 이들이 일본 근대 문명과 메이지 시대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데지마를 중심으로 서양식 학문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서양식 외과 수술과 해부학.
에도시대 후기에는 '난학'이라고 해서 네덜란드에서 유입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 1만엔권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난학을 배우고자 열아홉 살에 나가사키로 가서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네덜란드어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껴
영어도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1860년 막부의 견외사절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그가 집필한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등의 서적은 메이지 유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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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스키플루스 2009.02.04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나 딴지를 걸자면 난학이란건 사실 일본의 근대화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던것같습니다.
    난학의 본질은 네덜란드인과의 통역과 서양의학서의번역이 99.9%였거든요
    그러니까 전근대시기의 일본인들은 보편적으로 네덜란드어를 읽히고 그와함께 의학서를 읽는것으로 난학을 정의하는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네덜란드에서 수입했다는 서양의학이라는게 히포크라테스-갈레누스에서 유래한 체액병리학설에 유래되는 전근대의학이었습니다.
    피르효가 시작한 세포병리학에 근거를 둔 근대의학이 아니었다는것이지요 .
    거기에 서양의 사상이나 주의를 담은 사회과학서들이나 인문과학서들은 난학에서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편입니다.
    에도막부의 대외정책은 '쇄국'으로 쇼군을 위시한 최상위층만이 네덜란드와의 제한적인 교류를 할수 있었거든요 그
    기독교(카톨릭뿐만아니라 프로테스탄트)탄압도 연관있는 문제인데다가 막부는 심지어 네덜란드 의학서의 소개조차 금지시킨적이있습니다.
    결국 일본의 역사에서 네덜란드어를 소개하는 난학이 긍정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시기는 페리가 개항한 1854년 이후의 짧은 기간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전근대시기에 난학이라는 서양학문을 통해서 근대화를 준비하고 조선과 청과 다르게 근대화의 역량을 축적했다라는 인식은 좀 과장된 면이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일본이 근대화해서 제국주의노선을 걸을수 있었던건 서양의 거대 국제자본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견이 있을수도있지만
    일본은 지정학적인관점에서 거대한 국제자본이 동북아시아로 진출해서 영향력을 유지할수있는 전진기지의 위치를 가졌기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기린맥주, 조선소, 제철소등을 일본에 지어주고 메이지유신을 지원했던 토머스 글로버를 (구라바엔이 있지요 꽤 유명하던데)보면 충분히 납득가는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사족을 달자면 토머스글로버는 강화도 조약을 발생시킨 '운요호사건'의 운요호를 일본정부에 팔았었지요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2.04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디스키플루스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줍잖은 지식으로 포스팅한 제가 부끄럽네요 ㅠ.ㅠ 난학에 대한 상세한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 부끄럽지않은 포스팅을 쓸 수 있도록 저도 많이 공부하겠습니다~

  2. Favicon of http://lsmoon47.tistory.com BlogIcon Thogson 2017.07.20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아쉽지만 보이질 않네요. 재미난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