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y. 어감에서부터 세련되고 날렵해 보이는 소니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감히 한국 기업이 넘볼 수 없는 최첨단의 넘사벽 전자업체였습니다. 기술의 소니, 디자인의 소니, 명품 소니 등등. 해외는 물론 국내에도 알아주는 브랜드였죠.
그 뿐인가요, 다른 업체와 다르게 디자인을 중시하는 소니는 디자인을 먼저 한 다음 설계를 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제작해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고부터 예술적이었던 Vaio 노트북 시리즈, 이름 그대로 사이버틱한 디자인의 사이버샷 F-717 등등. 제품이 나올 때마다 ‘소니 밖에 할 수 없는’ ‘과연 소니다운’ 이라는 찬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제품들이었죠. 마치 지금의 애플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국내에도 소니 매니아가 엄청 많았었죠.
그런데 어떻게 된 게 2000년대 초중반부터 소니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TV에서 삼성에 뒤쳐졌고, 수익성도 계속 악화되어 지금은 삼성의 1/10 정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는 ‘차라리 삼성이 소니를 인수해라’ ‘소니의 평면TV 기술이 한국업체보다 1년 뒤쳐졌다’ 등등 수모에 가까운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소니는 그 전에 수많은 프로젝트 팀들이 독립적으로 제품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각 팀들이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고 제품을 개발하면서 발전도 많았지만 중복 투자, 선택과 집중이 안 되는 문제 등이 있었고 이런 것들이 쌓여서 소니의 채산성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하워드 스트링어 회장을 영입했고, 수많은 (돈 안되는) 사업부가 매각되었죠.
그럼 소니가 지금처럼 수모를 겪게 만든 삽질 프로젝트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까마득한 옛날의 베타맥스 포맷전쟁은 제외했습니다.
애완로봇 아이보
예전 일본 여행을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었죠. ‘소니 스타일’이라는 소니의 전시 매장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니의 최첨단 제품들이 즐비했던 이 곳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애완로봇이었던 ‘아이보’였는데요. 사람의 손짓에 따라 꼬리를 흔들고, 진짜 강아지처럼 손까지 내미는 이 앙증맞은 로봇을 보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었죠.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아이보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매니악한 물건이었기 때문이죠. 발상은 좋았으나 아이들을 위해 대당 200만원 가까이하는 비싼 장난감을 사줄 부모는 많지 않았답니다.
소니의 로봇은 춤추는 스피커 ‘롤리’를 끝으로 해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하워드 스트링어 사장이취임하고 나서 소니의 로봇사업부는 도요타에 매각되었는데요. 소니의 로봇 사업부가 도요타로 넘어가고 나서 만든 작품이 ‘피리부는 로봇’ ‘2족 로봇’ 등등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익이 안 나서 그렇지 계속 투자를 했다면 아마 꾸준한 기술력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니의 마지막 로봇 롤리.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제품 자체는 참신했지만, 이런 매니악한 물건을 만들면 기업은 망한다는 교훈을 남긴 제품이기도 합니다.
혼다의 ‘아시모’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요? 도요타는 소니의 로봇 사업부를 인수하고 나서 인간형 로봇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피리부는 로봇’이 바로 그것이었죠. 이외에도 마치 <미래소년 코난>에 나올 것 같은 2족 보행 로봇도 있답니다. 도쿄 오다이바에 있는 도요타 암럭스에 가면 구경할 수 있답니다.
최고급 소형 디지털 카메라 퀄리아
우리나라에 디지털 카메라 붐이 일기 시작하던 2002년. 당시에는 국민디카라 불리던 니콘의 쿨픽스 2500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요. 물론 소니에서도 ‘사이버샷’이라는 브랜드로 디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계 최초의 디카를 개발한 회사가 소니이기도 하구요.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당시에 소니는 기존의 P시리즈, W시리즈, F시리즈 이외에 ‘프리미엄 라인업’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카메라 하나를 개발합니다. 무려 200만(?) 화소를 자랑하는 이 카메라는 지금의 NEX에 버금가는 화려한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있었지요. 소니는 이 새로운 라인업을 가지고 프리미엄 디카 시장을 개척하려고 했는데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2003년 출시된 이 카메라의 이름은 퀄리아 016. 200만 화소에 불과한 이 자그마한 디카의 가격은 무려 38만엔, 우리돈 400만원 가까이 했답니다. 퀄리아는 비단 이 디카 뿐만 아니라 TV, 프로젝터, 오디오 시스템 등 소니의 프리미엄 제품군을 총칭하는 단어였는데요. 하워드 스트링어 회장이 취임하기 전 소니의 돈지랄의 마지막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니의 똥고집을 보여준 메모리 스틱
소니는 포맷에 대한 집념이 강합니다. 예전 80년대 빅터와 싸운 베타맥스와 VHS 규격이 그랬고, 최근의 HD-dvd와 블루레이 전쟁이 그랬죠. 유난히 독자포맷을 좋아하는 소니.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만한 제품 라인업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존 소니 사용자들도 불만을 가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휴대용 저장 매체인 메모리 스틱이었습니다.
휴대용 저장 매체인 메모리 카드는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와 더불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최초에 스마트카드, 컴팩트 플래쉬, sd카드, 그리고 소니의 메모리 스틱 등 여러가지가 혼재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컴팩트 플래쉬와 sd카드라는 2강으로 좁혀졌고, 현재에 와서는 sd카드가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소니는 자신들의 독자포맷인 메모리 스틱을 끝까지 고집했었던 것인데요. 소니가 생산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물론, 휴대용 게임기인 PSP, 노트북, AV기기에 이르기까지 소니 제품에는 무조건 메모리 스틱만 호환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메모리 스틱은 다른 메모리 카드에 비해 가격이 비쌌고, 여러 업체에서 생산하는 컴팩트 플래쉬나 sd카드에 비해 생산하는 곳도 단 두 군데(소니와 샌디스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죠.
그랬던 것이 드디어 2007년 소니의 첫 풀프레임 카메라인 알파 900이 나오면서 깨지기 시작합니다. 메모리 스틱 이외에 컴팩트 플래쉬도 호환되도록 만든 것이었죠. 이것이 소니의 굴복을 뜻하는 것인 것, 드디어 상황판단을 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용자 입장에서는 저렴한 sd카드를 쓸 수 있게 되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죠.
하지만 만만하지 않은 소니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소니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비록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퇴색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소니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수 많은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에 쓰이는 핵심 부품인 CCD 기술은 소니가 자랑하는 기술 중 하나이고, 아직도 방송용 장비 대부분은 전세계적으로 소니 제품을 많이 쓰고 있지요.
다만 소니는 그간의 성공에 도취되어 시장 상황과는 반대로 갔던 것 같습니다. 삼성과 같은 기업들이 대중의 기호에 맞춘 저렴하고 성능 좋은 제품을 내놓았던데 반해 소니는 너무 프리미엄급, 매니아 성향에 심취했던 것이지요. 이는 그간의 성공에 도취된 소니가 자신감을 가져 무리한 독자노선을 추구한데 기인합니다.
참,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감개무량하기도 하네요. 이제 소니 정도의 기업을 우리가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니, 우리나라 기업이 그만큼 발전한 것 같아 한편으로 기쁩니다. 세상에 영원한 1등은 없다고 하지요. 지금 삼성이나 LG같은 우리나라 기업이 잘 나간다고 하지만, 소니처럼 시장상황을 잘못 읽으면 순식간에 자리를 내 줄지도 모릅니다. 부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선의의 경쟁자로 우뚝 서기를... 소니도 어서 옛 명성을 회복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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