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왕궁을 둘러보다보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제각기 다른 양식을 지닌 탑도 그렇고, 이 열대의 나라에 중국복장을 한 석상도 수상하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 문마다 양쪽에 서서 지키고 있는 거대한 조각상이다. 태국의 국제공항 수완나폼공항에서도 본 적이 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태국을 대표하는 그 무엇이니까 공항에도 있고 왕궁에도 있는 것이 아닐까? 




태국에 전해지는 라마끼안 전설

그 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왕궁에 그려진 벽화다.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건 뭐지?'하면서 그냥 지나치는데, 이 벽화는 태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많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벽화는 태국에 전해내려오는 라마끼안 전설을 옮긴 것이다.
라마끼안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 서사시 라마나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내용이 거의 흡사한데, 어째서 힌두교의 전설이 태국까지 오게된 것일까.


 

라마끼안 이야기는 영웅 라마와 부인 시따에서 시작한다. 이 젊은 부부는 라마의 형제와 함께 숲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숲에는 마왕인 라바나가 은자로 위장해 시따를 납치하자 라마는 원숭이의 왕인 하누만의 도움을 받아 라바나를 물리치고 시따를 구해낸다. 이야기가 결말에 가까워지면 대전투와 속임수 끝에 라바나는 죽음을 맞이한다. 

 



                    ▶ 태국 왕궁에 그려진 벽화의 일부분. 원숭이 왕 하누만이 악령을 물리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라마는 힌두신인 비슈누의
6번째 화신이다. 비슈누는 여러 형태의 화신이 있는데 6번째 화신 라마는 바로 인간이다. 다른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왕조 시절부터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국왕이 곧 라마의 현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현재 태국의 국왕인 푸미폰 국왕 역시 정식 명칭은 라마 9세인 것이다. 그리고 라마를 도운 원숭이의 왕 하누만은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의 상징으로 왕궁의 입구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세워졌다.

그렇다. 왕궁에 문마다 있는 조각상은 바로 이 하누만이었던 것이다.

 




태국이 불교의 나라라고 하지만, 불교 역시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교이기에 태국 곳곳에서 힌두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인도와 가까운 인도차이나 반도의 나라들은 동양 3국과는 다르게 힌두교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불교 유적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의 예가 라마나야 전설에 나타난 하누만을 숭배하는 문화이다.



하누만의 전설은 중국으로 무대를 옮겨 서유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국에도 이 원숭이 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유기가 그것으로, 불법을 수호하며 악령을 물리치는 용맹한 원숭이의 모습은 라마야나 서사시에서 라마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던 하누만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서유기는 당나라 시절 인도에 불전을 구하러 간 현장법사의 실화에 기초한 이야기이지만, 굳이 원숭이 손오공을 호위무사로 등장시킨 것은 그 전부터 인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어온 하누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도에서 태어난 원숭이 왕의 이야기는 불교에 영향을 주었고, 중국으로 건너가 서유기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후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는 드래곤볼 이라는 사상 최고의 히트를 친 만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문화 컨텐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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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 미야자키현. 이곳은 일본 건국신화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 곳이다. 특히 미야자키현에서 북쪽에 위치한 다카치호는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사가 있고, 거기에다 초기 남방세력의 유입을 암시하는 전설도 남아있다.

 

수려한 녹음이 펼쳐진 다카치호 계곡. 이곳에는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신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아마노이와토(天岩戶) 신사라고 한다. 이 신사는 아마테라스가 숨었다는 동굴 아마노이와토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미야자키현 다카치호는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그 수려한 경치는 가히 일본 제일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동생인 스사노오의 거듭된 악행에 실망해 동굴에 숨어버렸는데, 그로 인해 지상은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마테라스가 태양을 상징하는 신이므로.) 세상이 암흑에 빠지자 인간들은 고통을 호소했고, 곤란하게 된 신들은 궁리 끝에 아메노우즈메 노미코토라는 신에게 동굴 앞에서 홀딱 벗고 춤을 추라고 했다. 신들이 그것을 보고 왁자지껄하게 웃자 아마테라스는 바위를 살짝 열고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바깥을 보게 되는데, 그때를 놓칠세라 힘의 신 다지카라 오노미코토가 바위틈으로 손을 뻗어 돌문을 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아마테라스를 동굴에서 나오게 하자 세상은 다시 빛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다카치호에 있는 아마노이와토 신사.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를 모신 곳이다.

 

아마노이와토 신사 앞에는 힘의 신 다지카라 오노미코토(手力雄命)의 상이 있다. 다지카라 오노미코토의 얼굴은 코가 크고 안색이 붉은 것이 특징인데, 이것을 두고 다지카라 오노미코토가 남방세력의 유입을 뜻한다는 학설이 있다.



아마노이와토 신사 앞에 있는 힘의 신 다지카라 오노미코토(手力雄命)의 상. 
 

 

현재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 서식하는 긴코 원숭이가 얼굴의 모델이 되지 않았는하는 것인데, 즉 아마테라스가 토착세력을 의미하고 여기에 다지카라로 대변되는 남방세력이 바위를 열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긴코 원숭이. 일본 도깨비 텐구의 원형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신화라는 것은 상징과 비유가 뒤섞인 것이기에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고대일본에서 토착세력과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과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 있어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다. 알타이 계통의 영향을 받아 광대뼈가 발단한 우리나라 사람과 대체로 얼굴이 갸름한 동남아시아 사람을 비교해서 봤을 때, 아무래도 일본은 동남아시아 쪽 영향을 더 받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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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allmask.tistory.com BlogIcon 생각하는 사람 2009.07.03 1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국신화 교수님께 2시간에 걸쳐배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 하군요
    비슷한 이름이 많이 나와서 그런가 봅니다. ㅎㅎ

  2. Favicon of http://adish.tistory.com BlogIcon adish 2009.07.03 14: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서양사람이 텐구의 원형인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이야기도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7.03 1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음 뷰에 '도깨비 텐구의 원형은 긴팔원숭이?'라고 에디터님이 제목을 붙여서 살짝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텐구의 원형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지카라 오노미코토쪽에 중점을 맞춘 이야기였기 때문에 텐구의 원형이 긴팔 원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3. 어신려울 2009.07.03 1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고 망측해라 ...
    저늠이 먹는데만 정신팔려서 뭐 나온줄 모르고..
    누가 좀 말려줘요..

  4. Favicon of http://nizistyle.tistory.com BlogIcon 한량이 2009.07.03 15: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에는 이런 것들이 많이 보이네요.

    노보리베츠에 갔을때도 역에서 내리니 도깨비상이 크게 있던데요..

    지옥천이라고 해서 도깨비가 서있었던거 같은데요.

    잘 보고 갑니다.

  5. Favicon of http://bacon.tistory.com BlogIcon Bacon™ 2009.07.03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네요. 일본 여행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는데, 일본에 대한 이해가 없이 다녀와서 사실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_@
    재밌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태국에 있는 제 3의 성, 레이디 보이(Lady-boy)

 

전 전세계의 갖가지 엽기적인 영상을 모아놓은 <쇼킹 아시아>라는 비디오에는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전환 수술하면 기이하고 괴기스러운 엽기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성전환 수술을 두고 더 이상 엽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 선택이라고 할 뿐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성별이 있다. 남자와 여자. 하지만 태국에는 세 가지의 성별이 있다. 남자, 여자 그리고 레이디 보이. 레이디 보이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의 별칭으로 태국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단어로, 현지 언어로는 까터이라고 한다. 거리를 걸을 때 마주치는 여자 10명 중 한 명이 레이디 보이라는 태국. 태국에 트랜스 젠더가 성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가 많은 것일까? 

 

 

여자로 사는 것이 먹고 사는데 더 도움이 된다



▶도시에 있는 많은 여성들이 유흥업에 종사한다.


태국은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관광을 제외하고는 자국에서 발전한 산업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라 도시에 사는 대다수가 관광과 관련된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직은 특별한 기술이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도 쉽게 일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일하기에 더 좋은 직종이다. 도시에서 남자에게 특화된 직업은 택시 기사 정도로, 오히려 먹고 사는 데는 여자가 더 유리하다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병사의 휴양지로 각광 받으면서 발전하게 된 유흥업을 들 수 있다. 음성적인 문화이지만 태국이 유흥업이 발달한 나라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수술을 통해 여자로 다시 태어나 유흥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파타야의 알카자쇼처럼 트랜스젠더로만 구성된 공연단도 있어 성전환 수술을 받더라도 생업을 이어가는데도 크게 지장이 없다.

 


오랜 독립의 역사가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했다



▶트랜스젠더만으로 단원이 구성된 태국의 알카자쇼


이웃에 위치한 베트남이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데 비해, 중국과 떨어져 있던 태국은 중국의 한자 문화권, 유교 문화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국의 문화적인 독립성은 유래가 깊고, 아시아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떨어진 19세기에도 유일하게 독립을 지켜낸 나라가 태국이다. 그래서인지 태국인들은 가치관에 있어서도 자유분방하고, 형식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편이다. 명분을 따지고 체면을 차리는 유교 문화적 사고방식보다는, 내가 행복한 것이 우선이라는 자유로운 사고 방식이 대부분의 태국인들에게 충만해 있다. 태국 정부도 성전환 시술을 하는 병원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인한 관광수입을 반기는 눈치다. 개인은 물론 정부도 실리를 추구하는 셈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나의 번뇌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먼저



▶태국은 개인의 깨달음을 우선시하는 소승불교의 나라다.


불교의 나라 태국.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를 믿는 나라인만큼 사회적인 인식이나 윤리적인 면에서 엄격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트랜스 젠더에게 이렇게 관대한 것일까? 태국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물음이다. 태국이 불교의 나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태국에 전래된 불교는 개인을 중시하는 소승불교로, 한중일 3국에 전파된 대승불교와는 차이가 있다. 대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대승불교가 이타적인데 비해,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한 소승불교는 가 중시된다. 이것이 점차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발전했고,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시선이나 윤리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권장하는 편이다.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수술을 통해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 개인의 번뇌가 수술을 통해 현세에서 구제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고난 성별을 섹스
(Sex)라 하고, 사회적인 성별을 젠더(Gender)라고 한다. 젠더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성역할론의 다른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만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 간극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은 의학의 힘을 빌어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트랜스 젠더라고 부른다. ‘남이 보는 나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나다운 것’을 선택한 사람들. 트랜스 젠더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느 쪽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어느 쪽이 옳으냐는 가치판단 대신 본인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를 보는 남의 시선인가? 한국인은 아직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블로그 재개 이후 간만의 붐업이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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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oyvillage.tistory.com BlogIcon 라이너스™ 2009.06.2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막연하게 불교 사상의 윤회설 떄문이 아닌가 하고생각했었는데...
    재미있는 글 잘보고갑니다^^

  2. Favicon of http://dogguli.net BlogIcon 도꾸리 2009.06.29 1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멋진 글, 굿~~~웃~~

  3. 지랄리아나 좆까만 2009.08.05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국인간들이 원래 이기적입니다. 특히, 여자들은 너무나도 대가 세서 부부싸움 도중에 남편이 가스에 불 붙이고 가스가 터져 둘 다 죽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저, 태국여자들 좀 많이 만나봤는데, 한마디로 너무나도 삐져요. (특히, 레이디보이들은 더 심해요, 그게!) 화교딸들이 좀 낫기는 한데, 그것들도 부모들의 딸래미교육이 너무나도 천차만별이라 질나쁜 애들은 너무나도 질나빠요.


견원지간, 불구대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는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 정말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나라가 있었다. 바로 전국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로 이 두나라는 오월동주, 와신상담 같은 고사성어를 남겼을 만큼 서로가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다만 사서에는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전재에만 초점을 맞춰 이들 왕과 관련한 세세한 사항은 적혀 있다. 다만 야사나 후일담을 기록한 책을 통해 이들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중 오왕 합려와 관련된 전설 속의 명검 막야검에 대한 이야기다.

 


보검 매니아, 합려

오왕 합려는 
자신의 무덤 속에 3,000자루의 보검을 함께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유난히 검을 좋아하는 제후였다. 쑤저우(蘇州)는 옛 오나라의 수도로, 합려의 무덤인 호구가 남아있다. 이 호구에는 합려의 무덤 뿐만 아니라 전설의 명검을 시험했다는 시검석(試劍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합려의 무덤 호구에 있는 호구검지. 3000자루의 보검을 함께 묻었다는 장소다.


 

오나라에는 간장(干將)과 막야(莫耶)라는 부부 도장공이 있었다. 합려의 명을 받든 이들 부부는 음양이 조화되고 신령이 강림한다는 시간을 기다려 최고의 조건 아래 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간 각고의 노력을 들여 드디어 자웅 한 쌍인 보검을 만들어 냈고, 이 두 개의 칼은 부부의 이름을 따서 ‘간장검’과 ‘막야검’이라 했다. 간장은 칼을 왕에게 바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아내 막야에게 말했다.


 

“웅검인 간장검은 숨겨두고 자검인 막야검만 왕에게 바치러 가오. 모르긴 해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거요. 당신은 임신 중이니 혹시 아들을 낳거든 웅검인 간장검을 찾아 반드시 복수하도록 일러주시오. 간장검은 문을 나서서 남산을 바라보는 돌 위 소나무가 서 있는 뒤쪽에 묻혀 있소.”


 

간장이 바친 자검을 받아 쥔 합려는 몹시 기뻐했으며, 또 다른 명검을 만들지 못하도록 간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정사로 여겨지는 사마천의 사기에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과의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간장의 아들이 복수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막야검을 시험했다는 시검석. 바위가 너무나 깨끗하게 잘려있어 조금은 의심스럽다.


 

합려는 바위를 잘라 막야검을 시험해 보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합려의 무덤인 호구에 남아 있는 시검석이다. 칼로 바위를 잘랐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너무나 깨끗하게 잘려있는 시검석을 보면 엉터리라고 치부하기도 애매하다.



▶합려의 무덤 호구를 상징하는 기울어진 탑.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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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oyvillage.tistory.com BlogIcon 라이너스™ 2009.06.2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멋진데요.
    왠지 아더왕의 엑스칼리버가 연상되는^^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6.27 1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저도 시검석을 직접 보긴 했지만 긴가민가 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연을 가진 관광거리로 괜찮은 거 같았습니다.

  2. 가브리엘 2009.06.26 1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장과 막야는 여러 버전이 있군요.....
    보통은 녹지 않는 철을 녹이기 위해 풀무에 막야가 뛰어들어 죽었다는 얘기와
    막야가 간장과 본인의 머리카락을 넣었다는 얘기가 돌던데요.....

    처음 제목만 봤을때는 삼국지연의의 유비와 손권이 바위를 벤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훨씬 더 이전 얘기였네요.....

    • Favicon of http://tomomo.tistory.com BlogIcon 토모군 2009.06.27 1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저도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다고 막야가 뛰어들었다는 버전의 이야기도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에밀레종과 왠지 비슷한 것이... 옛날 설화는 비슷비슷한 감이 있네요.


중국 근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송씨 자매

 

청나라 봉건 왕조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던 20세기 초, 중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중국의 민족지도자 손문孫文의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혁명정부는 각지에서 난립하는 군벌 세력들로 인해 힘을 결집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런 시기를 틈타 서구열강과 일본이 중국영토를 좀먹고 있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여걸들이 있었으니, 송애령,송경령, 송미령 송씨 세자매였다.



▶유년시절의 세 자매

 

손문의 친구이자 재정적 후원자였던 송요여宋耀如는 성경과 돈을 인쇄해 부유한 사업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는 쑨원의 혁명사상을 받아들여 먼저 자기 가정의 모든 봉건주의 잔재를 없애기로 결심하고 세 딸을 청조의 봉건주의 구습에 구애받지 않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시켰다.

 

큰 딸 송애령은 13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중국 최초로 미국에서 유학한 여성이 되었다. 뒤이어 1908년에는 송경령과 송미령을 함께 미국으로 유학 보내 세 딸은 모두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게 된다. 이들은 모두 총명하고 미인이었으나 장성한 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장녀 송애령은 당시 은행 재벌이자 중국 최고의 갑부인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했고, 둘째 송경령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살이나 차이가 나는 중국의 국부 손문과, 막내 송미령은 손문의 제자이자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將介石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둘째는 중국을 사랑했고, 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는 송씨 자매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시작된다.



▶손문과 송애경




▶장개석과 송미령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경령과 송미령의 대립이다. 송경령은 손문이 죽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여성 혁명가로 변신, 평생 중국 민중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송경령은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이 남편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 야욕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고 그와 대립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장개석과의 대립은 평생 이어졌으며, 장개석의 아내였던 동생 송미령과의 관계도 여기서 끝을 맺게 된다. 1945년 9월 항일 전쟁에 승리한 후 송경령은 모택동과 손을 잡고 송미령과 그녀의 남편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송경령은 남편 손문의 뜻을 이어받을 정부로 중국 공산당을 택한 것이다.


▶사저에서 모택동을 맞이하는 송경령



▶남편을 도와 대만의 외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송미령


그 후 송경령은 대륙의 중화인민 공화국에서, 송미령은 국민당 정부의 대만에서 각각 국모로 추앙 받게 되니, 가히 한 집의 자매가 전 중국의 국모를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자매의 활약상은 1997년 ‘송가황조<宋家皇朝>’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파란만장했던 송씨 자매의 역사는 2003년 10월 막내 송미령이 미국에서 사망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세 자매의 일대기를 다룬 '송가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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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나 축구 국가대항전에서 흔히 각 나라별 대표팀의 별칭을 부르곤 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오렌지 군단’이고, 스페인은 ‘무적함대’, 우리나라는 알다시피 ‘붉은 악마’라고 부른다. 그럼 전통적인 축구 강국 독일의 별명은? 바로 ‘전차군단 독일’ 이다. 독일과 전차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일까?




 
 

질풍노도와 같은 독일의 압박축구


세계 최초의 전차가
1차 대전에서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신무기였던 전차는 기밀유지를 위해 ‘물탱크’라고 불려졌고, 나중에는 이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어 ‘탱크’라고 불리게 된다. 전차를 가장 먼저 만든 것은 영국이지만 전차를 가장 발전시킨 나라는 독일이다. 단순히 전차를 잘 만들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전차를 운용한 전술을 최초로 개발한 나라가 독일이기에 2차 대전 이후로 독일은 최고의 전차 강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특히 질풍노도와 같이 밀어붙이는 독일의 압박축구가 흡사 독일 전차군단의 진격과 같다 해서 붙은 별칭이기도 하다.



▶최초로 전차를 운용한 전술을 개발한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독일 장인정신의 결정체
, 전차


독일의 전차는 기술력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 화력과 방어력, 기동력이라는 전차의 3박자는 물론, 승무원의 쾌적함까지 고려한 독일 전차는 독일의 최고 브레인들이 참여한 기술의 집합체였다. 당시 전차 설계에는 오늘날 스포츠카 메이커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셰박사도 참여했는데, 이외에도 제조업에서 이름을 떨치는 거의 모든 메이커가 회사의 명예를 걸고 전차 개발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고를 지향한만큼 걸출한 전차가 많이 생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급을 다투는 전시에 지나치게 꼼꼼한 독일 기술자들의 장인정신은 오히려 장애가 되었고, 러시아가 5대의 전차를 생산하는 동안 독일은 1대의 전차를 생산할 정도로 속도가 떨어졌다. 한 마리의 히드라가 다섯 마리의 저글링을 이길 수 없듯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물량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최고의 전차로 꼽히던 티이거-I




▶독일의 전차기술은 현재까지 명성이 높다. 최고의 3세대 전차라 일컬어지는 레오파트2
 




최고의 기술력은 자동차 산업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BMW, 아우디, 포르셰, 폴크스바겐 등이 모두 독일에 연고를 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시에 축적된 전차 기술은 전후 자동차 분야로 옮겨가고, 이 기술들은 하나같이 최고의 엔진, 최고의 내구성을 갖추는데 활용되었다. 장인의 피를 이어받은 독일인답게 그들 특유의 꼼꼼한 마무리는 품질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메이커로 성장하게 되었다.



▶독일차는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전쟁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 타인을 살상하는 전쟁이 건전한 목적으로 발전된 것이 스포츠이고 보면 이 둘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축구 하나만 보더라도 그 나라의 성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순식간에 몰아붙이는 독일의 압박축구가 전차군단의 진격과 같다면, 우리나라의 축구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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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ogguli.net BlogIcon 도꾸리 2009.06.24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복귀 환영!

 

얼마 전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끄는 드림웍스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3억 달러의 투자를 받게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토이스토리로 호황을 맛본 이후 작품들의 흥행이 그닥이었는지 그간 자금 융통이 안돼 꽤 곤란을 겪었었다고.




 

이번에 드림웍스에 투자하는 큰 손은 릴라이언스 빅 엔터테인먼트. 돈은 은행에서 받고 릴라이언스 측은 이 금액에 상당하는 매칭펀드를 조성해 투자하는 방식이란다. 그런데 릴라이언스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 하다. 알고 봤더니 포브스지 선정 최고 부자 5위에 올랐던 무케시 암바니 회장이 이끄는 릴라이언스 그룹의 자회사였다. 그런데 그는 무려 인도인이었다.

 


, 그런데 인도에 이런 부자가 있었어??

인도를 단순히 인구만 많은 가난뱅이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세계적인 경제전문지 포브스지가 2008년 선정한 세계 10대 부호 명단에는 인도인이 무려 3명이나 들어가 있다. 물론 상위층만 보고 ‘인도는 부자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정몽준 의원도 겨우 412위인 것을 보면 대단한 일이다. (모두가 예상하는 대한민국 최고부자는 이건희 회장이 아니었다!!)

 

, 그러면 포브스지에 이름을 올린 인도 최고 부자 3명에 대해 알아볼까?

 

 

락시미 미탈 | 미탈 그룹 회장

-포브스 순위 4위. 450억 달러(2008년 기준)



락시미 미탈 회장은 26세에 인도를 떠나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 현재는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 업체인 ‘아르셀로 미탈’의 회장으로 거듭났다. 그는 당시 사양 산업으로 인식되던 동유럽의 제철소들을 헐값에 인수하여 몸집을 키웠고, 결정적으로 최대의 명성을 떨치고 있던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 제철소를 인수합병함으로써 연간 1억 3천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명실상부한 최대의 제철기업을 만들게 된다. 현재 생산량으로 따져본 세계 철강 회사 순위는 아르셀로 미탈이 1위, 일본의 신일본제철이 2위, 대한민국의 포스코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2위와 3위의 생산량을 모두 합쳐도 아르셀로 미탈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로 그녀의 딸인 바니샤 미탈은 포브스가 선정한 ‘가장 돈 많은 상속녀’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케시 암바니 |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

-포브스 순위 5위. 430억 달러(2008년 기준)



그는 사업여정을 보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릴라이언스 그룹을 신사업에 뛰어 들어 그 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모를 키워놓았기 것이다. 섬유산업을 위주로 하던 릴라이언스 그룹은 그가 취임한 후 석유화학 사업에 뛰어든다. 전혀 분야가 다른 비즈니스였기에 주위에선 만류했지만 그는 계획을 밀어붙였고, 천부적인 사업감각과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특기를 살려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이후에는 휴대폰 사업에 뛰어 들어 혁신적인 저가요금 전략을 통해 인도 휴대폰 시장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2007년에는 전세계적인 주가 폭등에 힘입어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을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보통 부자들은 드러내 놓고 돈자랑을 하지 않는 반면 그는 대놓고 사치를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내의 생일선물로 400억 원짜리 에어버스를 선물하고 60층 짜리 초호화 저택을 짓는 것을 보면 과연 최고의 갑부다운 씀씀이를 자랑한다.

 

 

라탄 타타 | 타타 그룹 회장

-포브스 선정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



글로벌 시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타그룹은 오랜 전통을 가진 거대 그룹이다. 1858년 무역 회사로 창립한 이후 1901년에는 인도 최초의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그 후 10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장은 계속되어 현재는 자동차, 제철, 정보통신, 항공 등 다양한 사업영역에 진출해 있으며 고용인원만 30만 명에 이르는 가히 인도 최대의 기업이다. 타타그룹은 우리나라 외환위기 당시 대우 자동차의 상용차 부분을 인수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자동차 ‘나노’를 출시함으로써 세계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 타타 회장은 환화로 250만원에 불과한 나노를 인도의 ‘국민차’로 보급시킴으로써 인도의 열악한 교통 환경을 개선하고 오토바이 사고를 감소시켜 인도 경제 부흥의 기폭제로 삼겠다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타타 회장은 비록 세계적인 부호 명단에는 끼지 못했지만, 인도의 국민 기업으로서 자국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로 인정받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 회장 밖에 모르는 우리나라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유명하고 훨씬 더 돈 많은 인도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인도.. 님 좀 짱인 듯.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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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allmask.tistory.com BlogIcon 생각하는 사람 2009.06.24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도는 IT강국이기 때문에 앞으로 부자가 점점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ㅎㅎ

  2. Favicon of http://www.edhardysale.org.uk BlogIcon ed hardy clothing 2011.01.20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명하고 훨씬 더 돈 많은 인도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인도.. 님 좀 짱인 듯.

우리나라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의 수는 전체인구의1%도 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200년이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가장 열성적인 신자를 가진데 비해 일본의 기독교는 신기하리만치 인기가 없다. 그러나 일본에도 기독교 문화가 융성하던 시기가 있었다. 에도시대의 정책적인 기독교 말살로 인해 지금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분명 일본에도 기독교 문화는 존재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규슈에 있는 나가사키현은 일본 기독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서양 무역선이 가장 먼저 닿았던 곳이 나가사키의 히라도였고 이들을 따라온 선교사들이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회라 이름지은 카톨릭 선교 단체는 신교인 프로테스탄트가 퍼져가는 유럽 대신 동남아 식민지라는 새로운 선교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나가사키 지역을 거점으로 해 일본 열도 전체를 카톨릭 신자의 나라로 만든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선교활동은 효과를 거두어 짧은 세월 동안 규슈 전체에 걸쳐 30만 명이라는 신자를 확보하게 된다.



인도와 마카오를 거쳐 일본에 닿았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아시아 기독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독 규슈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발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규슈의 중심지였던
 히고
(肥後. 지금의 구마모토)의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서행장으로 잘 알려진 고니시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투톱을 이룬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둘은 워낙 사이가 나빠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아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린 경우도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고의 영주로 부임하게 되고 크리스천 다이묘의 비호 아래 이곳의 백성에게도 기독교가 널리 퍼져 나가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는 동군과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를 받드는 서군으로 나뉘어 내전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도쿠가와 진영이 승리함에 따라 도요토미 편에 섰던 고니시는 몰락하게 된다. 후임으로 규슈를 지배하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라이벌이었던 고니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독교 신자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가토의 영향 아래 있던 인근 영주들도 이에 동참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 현재는 구마모토성으로 유명하다.
 


탄압에 시달리던 기독교 신자들은 구마모토 옆에 위치한 시마바라 반도에서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 이것이 그 유명한 ‘시마바라의 난’이다. 비록 기독교 신자들이 주동하긴 했지만 영주의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도 가담했기에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중세의 대표적인 농민 봉기로 기록되고 있다.
신통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16세 소년 아마쿠사 시로가 이끌었던 시마바라의 크리스천군은 결국 에도 정부군에 의해 모두 전멸하고, 이 전란을 끝으로 융성했던 기독교 문화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전국시대부터 에도막부가 성립되기까지는 채 100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에 일본의 기독교는 불꽃처럼 일어났다 사그러들었다.



                    시마바라 반란군을 이끌었던 16세 소년 아마쿠사시로 도키사다



             신통력이 있었다는 전설로 인해 모 게임에서는 악역 보스로 출연하기도 했다.

 

에도시대의 정책적인 탄압으로 인해 일본의 기독교는 그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고 말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일본 기독교의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나가사키의 기독교 유적은 하나씩 복원되었다. 히라도의 성 프란시스코 성당, 사세보의 미우라 천주교회, 나가사키의 26성인 순교비 등이 바로 일본의 옛 기독교 문화를 알려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단순히 예쁜 건물이라는 감상보다는 이런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인 배경에 눈을 돌려보는 것도 나가사키 여행을 풍성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지.


                   서양 무역에 있어 창구가 되었던 히라도를 상징하는 건조물, 門



                                   사세보역 근처에 있는 미우라 천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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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혜연 2011.04.17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은 예수안믿고도 부자나라가 되었지만 결국 자연재해로 모든것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이사건갖고 보수개독먹사들은 일본가서 그딴말 하기만해봐라! 다 디진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역사의 슬픈 단면이다. 알다시피 가미가제라는 말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공을 막아준 태풍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신풍(神風)이 불어 일본을 보호해 주었듯이 일본을 보호하는 인간무기가 되라는 뜻으로 이름 붙인 가미가제 특공대. 전쟁 막바지에 물자가 달리던 일본이 생각해낸 엉터리 궁여지책 때문에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쓰는 특공대의 어원도 가미가제에서 유래한다. 가미가제 부대는 일반 부대와 구분하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라고 불렀고, 부대원을 특공대원으로, 가미가제 공격에 쓰이는 비행기를 특공기라고 불렀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특공대를 붙이지만 그 유래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규슈에 있는 가고시마는 일본 본토 최남단으로, 가고시마에서 조금 떨어진 지란이란 곳에 가미가제 출격장이 있었다. 1945년 종전시까지 이곳에서 출격한 비행기는 총 80대 이상으로, 그말인즉슨 8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가미가제 특공대가 사이판이나 필리핀 같은 남태평양에서 출격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곳은 본토로 밀려오는 연합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 같은 역할을 맡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런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에 이곳에 가미가제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한국사람에게는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자그마한 것이라도 기록을 남기기 좋아하는 일본인답게 인근에 사는 일본인들은 많이 찾는 편이다. 폭발로 완전히 그을린 비행기 잔해부터 무운을 빌어주는 부적, 출동하기 전에 가족에게 남기는 유서 등 나름대로 비장미를 살려 꾸며놓았지만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애국의식이 투철한 편은 아니라 일본이 반성을 안하고 있다느니, 역사를 왜곡한다느니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의 사실을 두고 이미지를 변형시켜 이렇게까지 포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오늘날 일본인의 잘못된 전쟁인식에는 이런 포장된 역사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장열하게 희생한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사진 옆에 일본인에 의해 착취와 억압을 받던 식민지 국민들의 사진도 나란히 진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다음 블로거뉴스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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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oyvillage.tistory.com BlogIcon 라이너스™ 2009.04.21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미가제라...
    저런 곳을 버젓히 만들어 놓고 운영한다는거자체가
    전쟁범죄자를 영웅으로 그린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듯.
    씁쓸하네요. 좋은 하루되세요^^

  2. Favicon of http://www.starykj.com BlogIcon 홍콩늑대 2009.04.21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일본사람들 입장에서는 영웅시 한다면 일본 어린 학생들이 뭘 배울지...

  3. 2009.04.2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미가제
    반은 한국인들었다죠?

  4. Favicon of http://kpga3582naver.com BlogIcon ㅁㅁㅁ 2009.04.2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놈...무슨 근거로 씨부리냐??

  5. Favicon of http://raonyss.tistory.com BlogIcon 라오니스 2009.04.21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거 보면 일본사람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나라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발상들... 기가막히기도 하지요...
    특공대라는 말의 어원은 씁쓸하기도 합니다...

  6. Favicon of http://flypo.tistory.com BlogIcon 날아라뽀 2009.04.21 1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모님 덕분에 역사공부를 했네요^^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남은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7. Favicon of http://readygotour.com BlogIcon 레디꼬 2009.05.14 0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이런곳이 있다니...
    쫌 맘에 안드네요!!!
    저 뿐 아니라 사이고 다카모리 등등 때문에라도
    가고시마는 우리나라사람들이 여행가지 말아야할 곳인듯!!

  8. 최동현 2010.09.15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똑똑한 울나라 학쌩 청년들만 착출했대요

  9. 최동현 2010.09.15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가틈 포탄 잔뜩실쿠 일본천황놈있는곳으로 가서 처박겠네

  10. 황병권 2017.07.28 1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미기제 귀신 바람은 몽고군이 하필 태풍이 있는 시기에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계절풍을 모르고
    침공했기 때문밉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많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조총 같은 무기의 발전은 빨랐지만 문화적인 발전은 더딘 편이었다. 조선에서 납치한 수많은 기술자 중에 특히 환영받는 계층이 있었으니, 바로 그릇이나 항아리를 만드는 도자기 기술자들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나무로 만든 밥그릇을 썼다고 한다. 도자기로 만든 밥그릇은 부유층이나 귀족들만이 점유하는 사치품이었고, 일반인이 도기그릇을 가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현재 빼어난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일본 아리타야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손들이 만든 것이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들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도자기 기술 유출을 막으려는 영주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조선인들끼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이 중에는 이삼평이라는 걸출한 인물도 있었다. 속설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던 이삼평이 전란 후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워 자의로 일본군을 따라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빼어난 도공이었다는 기록만은 차이가 없다.

규슈로 끌려와 처음 도자기를 굽던 이삼평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일본에는 한국의 고령토처럼 질 좋은 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 만든 도자기는 대부분 쉽게 부서졌고,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질 좋은 흙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규슈 전역을 돌며 도자기 만들기에 적합한 흙을 찾아나선다.



                   이삼평이 발견했다던 이즈미야마 광산. 이곳에서 질 좋은 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삼평은 드디어 고령토에 버금가는 질 좋은 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곳이 현재의 아리타(有田) 부근에 있는 이즈미야마 광산이었다. 이삼평은 그 곳에 정착해 평생동안 도자기 굽는 일에 매진하게 되고, 이삼평의 자손들도 대를 이루어 아리타에 살며 도자기 굽는 기술을 계승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일본의 도조(陶祖)로서 이삼평을 기리는 비석과 신사가 세워져 있다.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 도자기의 신을 모신 신사답게 도리이도 나무가 아닌 자기로 만들어졌다.

 

예전에 일본을 방문한 영국 수상에게 일본의 도자기를 선물하는 모습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계승할 사람을 찾지 못해 대가 끊길 지경에 처해있는데, 우리나라 도공의 후손이 만든 일본의 도자기는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명품으로 선정되고 있으니 참 기분이 묘했다. 규슈 사가현은 이마리와 가라츠, 아리타 등 일본 제일의 도자기 산지가 모여있는 곳이다. 사가현은 규슈 7개현 중에서 외국인의 눈길을 끌만한 화려한 관광자원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대 문화를 알 수 있는 역사유물이 많이 흩어져 있다


             아리타와 함께 도자기의 명산지라 불리는 이마리. 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공방이 늘어서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삼평은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본에 남았다고 한다. 사농공상의 계급에 따라 기술자가 천대받는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에 남는 것이 더 대우가 나았기 때문이다. 대대로 기술자를 천대하는 우리나라의 풍조가 오늘날 도자기 선진국 자리를 일본에 넘겨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 아쉬울 따름이다. 


Posted by 토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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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ogguli.net BlogIcon 도꾸리 2009.04.17 1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내용 좋습니다~
    아자아자~

    추천 꾸욱~~

  2. Favicon of http://imsosorrybutiloveu.tistory.com BlogIcon 되면한다 2009.04.17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음 정말 안타깝네요
    좀 다른얘기일수도 있지만 도자기?를 영어로 japan이라고 하던가요..
    이게 일본이랑 관계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korea라고 할만큼 더 좋은 기술이었을텐데 아쉽네요

  3. Favicon of http://blogislife.tistory.com BlogIcon 필넷 2009.04.22 1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술자들이 대우 받는 세상이 되어야 할터인데...
    MB 정부는 그냥 삽질밖에 모르고... --;

  4. Favicon of http://browncafe.tistory.com BlogIcon 클라리사 2009.07.26 0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제로 끌고간 조선도공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가 발달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이지요.
    자랑스러워할 수도 없고 분해할 수만도 없는...

    우리가 밥 그릇으로 썼던 막사발을 일본에서 차완으로 쓴다고 해서
    또 우쭐해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이 원조인가가 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걸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