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

여우누이뎐, 구미호보다 무서운 사람 탈 쓴 양반

KBS2 TV의 드라마 ‘여우누이뎐’이 조용히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뒤이어 하는 수목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처럼, 별로 기대하지 않고 주목받지 않았던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역들의 열연으로 빛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마다 방영됐던 전통적인 납량특집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현대판이라고 할 ‘여우누이뎐’은 우리에게 친숙한 구미로를 테마로한 드라마입니다. CG가 발달한 요즘 최신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살짝살짝 비치는 구미호 꼬리나 분장 수준으로 봐서 ‘와!’하고 환성을 지를 정도는 아닌데요.

하지만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특수효과나 구미호라는 소재 때문이 아닌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스토리의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신분 사회를 조명한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구미호는 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혼인을 맺어 인간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10년의 세월을 견뎠으나, 하필 10년이 되는 그날 남편은 아내가 구미호라는 비밀을 발설하게 되고 뜻을 이루지 못한 구미호는 딸 연이와 함께 산 속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어리고 연약한 딸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된 모녀는 병치레가 잦은 딸을 가진 윤대감의 눈에 띄게 됩니다. 윤대감은 모녀를 가족처럼 감싸주고 구미호도 차츰 마음을 열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윤대감이 이들 모녀를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산 아이의 간을 구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윤대감네 식구들은 연이 모녀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연이에게 사랑하는 현감댁 도련님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대감집 아씨(서신애)는 연이에게 갖은 핍박을 가하는데요. 이에 가세해 윤대감의 후실이 낳은 두 형제까지 가세해 연이는 얼굴에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현감댁 도련님과 데이트를 한 사실을 안 아씨는 질투가 극에 달해 몸종을 시켜 연이를 우물에 빠뜨리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여우누이뎐’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무서웠던 장면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노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연이의 신분이 노비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주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처벌이 가능했습니다. 노비는 인간이 아닌 가축과 같은 재산의 일부로 치부되었기에, 법으로 정해지는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주인의 판단으로 행해지는 처벌에 대해, 국가에서도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국가에서 관여하려 하더라도 집안에서 행해지는 일이기에 알기가 어려웠고, 사후에 가혹행위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큰 처벌을 내리기는 힘들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비에 대한 인권을 다룬 사례가 몇몇 언급되고는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일로, 앞서 연이를 우물에 빠뜨린 것과 같은 주인의 횡포는 기록만 되지 않았을 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횡행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아랍권에서 행해지는 ‘명예살인’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는 여우누이뎐의 다른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연이를 괴홉히는 윤대감의 아들 형제의 일은 머슴인 천우에 의해 윤대감에게 알려지고, 이 때문에 큰 아들은 회초리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큰 아들은 밤에 천우를 불러내 매질하며 사적인 보복을 하게 되지요.

이 장면 역시 너무나 가슴이 아픈 장면이었는데요. 노비는 옳은 일을 했어도 주인의 매를 묵묵히 맞아야 하고, 어느 누구에게 토로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만일 주인의 부정을 관가에 고발하게 되면, 주인도 처벌받지만 고발한 노비도 벌을 받게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주인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신분사회였던 중세시대, 종이나 노비 같은 하층민의 인권이 무시되는 사례는 비단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칼을 가진 사무라이가 하층민을 베어도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적당한 핑계만 만들어내면 그 뿐이었습니다. 서양에서도 봉건시대 영주가 결혼하는 여성의 처녀성을 갖는 ‘초야권’이란 제도가 있었지요. 이는 모두 지배층의 횡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우누이뎐을 보며 내내 드는 생각은 어쩌면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섬뜩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무기로 휘두르는 지배층의 횡포, 묵묵히 견딜 수 밖에 없는 힘 없는 노비들의 삶. 이런 것들이 드라마 속에 녹아있기에 여우누이뎐은 단순한 호러 드라마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 합니다.

그리고 구산댁 모녀를 감싸준 윤대감 역시 실상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아이의 간을 가지기 위해서임을 볼 때, 여우누이뎐에서 진정 무서운 것은 구미호가 아니라 사람 탈을 쓴 양반, 인간들임을 알 수 있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드라마는 슬슬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는데요. 구미호로 변신한 이들 모녀가 그들을 핍박하던 양반들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기대가 됩니다.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갈등이 어찌 이리 오늘날 우리 사회와 닮아있는지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