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면전차의 낭만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도 전차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총알택시처럼 빠르지도 않고, 서울 메트로처럼 촘촘한 노선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교통수단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낭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시내를 달리는 느릿느릿한 전차를 생각하면 왠지 나를 동화 속 오즈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만 같은 설레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마음 속에는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전차에 대한 향수나 동경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홍콩의 전차, 트램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된 이유는 TV나 영화에서 봤던 유럽의 모습이 한 몫 한것이 아닐까? 특히 관광명물로 자리잡은 영국의 2층 버스와 노면전차는 영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이미지는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은 여러 면에서 모국(?)의 영향을 받았는데, 홍콩의 전차인 트램도 마찬가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배우 이은주의 안타까운 모습. 전쟁에 미쳐버린 병사. 잔인한 전투장면. 장동건과 원빈의 이념을 뛰어넘은 형제애 등...
인상깊은 장면이 많은 명작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내 기억에 맴도는 장면은 좀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화로운 서울의 모습이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영화 초반부에 원빈과 장동건이 무임승차(?)하던 서울의 노면 전차였다.
홍콩은 버스나 전차나 예외없이 2층이다. 2층 맨 앞자리에 앉으면 전망도 전망이지만 느린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스릴까지 느낄 수 있다. 커브를 틀 때면 '이러다 혹시 넘어지 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약간의 불안함과 함께 짜릿함이 느껴진다. 특히 홍콩섬에 있는 센트럴과 코즈웨이를 잇는 라인은 여행자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주요 관광지를 모두 연결할 뿐만 아니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운행하기 때문에 '홍콩 트램은 이런것이다'라는 맛을 보기에 충분하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많은 사람들이 피크 트램과 트램을 혼동하는데, 트램은 말그대로 그냥 '노면전차'를 말하고, 피크 트램은 경사진 빅토리아 산정을 오르는 관광열차이다. 두 가지 모두 트램이지만 일반적인 노면전차의 의미는 전자에 가깝다.
전차박물관 나가사키
노면전차는 일본에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전차를 가설한 일본이기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전성을 이루었던 것이 일본의 노면전차. 하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단독노선을 사용하는 JR전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차도와 노선을 함께 쓰던 노면전차는 점점 쇠퇴하게 된다. 오늘날 유일하게 전차를 운행하고 있는 곳은 규슈와 홋카이도의 몇 군데 밖에 없다. 이중에서 가장 활발히 노면전차를 운행하고 있는 곳은 우리에게 원폭투하지로 널리 알려진 나가사키다.
나가사키는 버스보다 노면전차가 더욱 발달한 곳이다. 주요 관광지가 전차정거장을 기준으로 안내되어 있고, 관광지 할인권이 포함된 전차패스도 판매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의 최신식 전차에 이르기까지 노면전차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한데,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전차를 철거하면서 그 차량들을 전부 나가사키로 보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종을 땡땡 울리며 출발신호를 알리는 차장의 모습은 여전하다. 상상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전차에 대한 동경을 해소시키기는 충분한 편이다.
**일본 규슈에는 나가사키 말고도 구마모토와 가고시마에서도 노면전차를 운행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다채로운 전차를 구경하고 싶다면 나가사키가 가장 좋다.
'여유로움'이란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교통수단, 노면전차
홍콩의 트램과 나가사키의 노면전차. 홍콩의 트램은 2층인만큼 좀더 웅장한 유럽스타일이고, 나가사키의 노면전차는 단층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일본스럽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 둘은 빠르지도 않고 그다지 편리하지도 않다. 하지만 여행의 본질이 무엇일까? 바쁘게 여기보고 저기보고 하면서 뛰어다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여유로움'이란 단어에 가장 근접한 교통수단일지도 모른다. 홍콩이건 나가사키건, 올 여름엔 전차에 올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지? 깜빡 졸다가 종점까지 가도 상관없다. 다른 전차에 타고 다시 졸면 어느새 되돌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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